제이슨 시걸로 복기하는 데이빗 포스터 월러스
정말정말 보고 싶었다. 미국 소설가 데이빗 포스터 월러스를 다룬 <The End of the Tour>. 월러스의 대표작도 국내에서 제대로 출간되지 않은 마당에 그를 소재로 한 영화의 개봉을 기대한다는 건 언감생심. 아무리 보고 싶은 영화라도 금붕어 기억력 탓에 금세 잊어버리는 게 다반사인데, 이 영화는 틈날 때마다 토렌트로 검색해서 도대체 언제 올라오나 자라목 빼고 기다렸다.
휴버트 드레이퍼스가 쓴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알게된 데이빗 포스터 월러스. 월러스 하면 단연 그의 출세작 <Infinite Jest>. 그를 일약 걸출한 엑스 세대 작가로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Infinite Jest> 국내 번역본은 없다. 출간되었다 절판된 걸로 알고 있고, 에세이 <이것은 물이다> 한 권만이 현재 입수 가능하다. 제3세계 출신도 아니고 이렇게 유명한 미국 작가가 국내에선 변변찮게 소개조차 되어 있지 않다니 참으로 뜻밖이다. 국내 편집자들이 그의 존재를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아마 상업성이나 콘텐츠 면에서 국내 출간(복간)이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텐데, 영화 개봉을 시발로 꼭 제대로 소개되길 바란다.(그러기엔 영화 흥행성이나 파급력이 몹시 미약해 보이지만...)
때는 바야흐로 월러스가 <Infinite Jest>을 내놓으며 문단의 신성으로 칭송되던 1996년. 프루스트, 핀천에 비견되며 세간의 관심을 한데 모았다. 롤링스톤지 기자 데이빗 립스키가 닷새에 걸쳐 데이빗 포스터 월러스의 북투어에 대동하며 기록한 취재 일지를 극화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데이빗과 데이빗의 교감. 립스키가 취재 당시 확보한 실재 녹음 테이프를 근거로 살을 붙였지만 립스키의 기억에 의존하는 월러스의 초상은 불완전할 뿐이며 그마저도 영화라는 매체에 굴절되었다. 더욱이 립스키가 부활시킨 월러스는 20대의 치기 어린 버전임을 상기해야 한다. 월러스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작가였는지 그 누구도 명료한 답을 내놓을 순 없다. (누군들 절대적 언어로 규정될 수 있겠냐만은) 다면체 월러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일화를 하나둘씩 기워가며 저마다 소설을 쓰는 가운데 월러스라는 작가를 재조명하게 된다.
립스키는 글로 먹고사는 글쟁이로서 동종업계에서 승승장구하는 월러스의 재능을 질투하면서도 외경을 감추지 않는다. 립스키가 경험한 월러스는 기인과 범인이 중첩되는 해괴한 에술가였다. 사람과의 소통보다는 애완견 두 마리를 키우며 일방적 애정 관계에 안식하고 정크푸드에 탐닉하는 불량 식습관을 가졌다. 월러스를 가장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은 립스키와 월러스가 편의점에서 함께 주전부리를 사는 장면. 립스키가 회사돈으로 결재하겠다고 하자 더치 페이 모드 급해제.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동시에 번개처럼 되돌아가 먹을 것를 쓸어오는 지질한 소탈함(?)도 지녔다. 립스키가 자신의 옛 여자친구에게 지분거리자 대노하며 일순간에 마음을 닫아버리는 갈등을 빚기도 한다. 막역지우라도 몇 날 며칠을 붙어있다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별게 다 거슬리고 틀어지게 마련. 삐걱 거리던 두 사람 간의 감정의 골도 훈훈하게 해소되고 5일 간의 여정은 막을 내린다. 안타깝게도 립스키의 기사는 불쑥 터져버린 '한층 더'자극적인 소재거리'에 밀려 끝내 게재되지 못했고 월러스 사망 이후 정식으로 자신의 책을 펴내면서 세상 빛을 보았다.
큰키에 호남형 얼굴, 손질 안한 듯 지저분한 장발에 둥근테 안경, 머릿두건은 월러스의 시그니처 행색이었다. 힙스터스러운 매력적인 외양와 비상한 글재주. 대중의 호감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월러스가 생전 남긴 대담 영상들을 보면 상당한 지력의 달변가임을 알 수 있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유약한 음성으로 조곤조곤 본인의 의견을 유창하게 피력한다. 주류에 편입되길 거부하고 고독을 자처하는 반사회인이었으면서도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켰던 샐린저나 쥐스킨트 대비 강도 낮은(?)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사회로부터 단절하지 않고 저술 활동 외에 대학 강의도 하며 미디어에도 종종 얼굴을 내비쳤다.
2008년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먼길을 온 립스키에게 선뜻 거처를 제공하는 온정을 지녔으면서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방어적 태세를 고수하는 유약한 심성. 넘치는 재능을 발산하기에 자기도취와 자학의 낙차가 너무도 컸던 게 아닌가 싶다. 자살, 만성 우울, 약물 중독, 제자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 자살했다는 팩트를 제외하곤 모든 혐의(?)가 전혀 낯설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타고난 음울을 내재했다. 자살은 비탄에 찬 극단적 선택이었지만 그를 알던 많은 주변인들로선 어느 정도 예견했던 말로였을 것이다. 평범한 정신 상태로는 훌륭한 예술이 탄생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강화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월러스 역을 맡은 제이슨 시걸 캐스팅을 두고 논란이 분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체격적인 면에서야 월러스를 재현하기 더할나위 없이 알맞지만 그동안 제이슨 시걸이 쌓아온 연기 지형 및 배우적 심상과는 현격히 대척되기 때문이다. 제이슨 시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산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벙하면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나름 아역 출신에다 미드 <How I met your mother> 같은 코미디나 어린이 가족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다보니 키덜트의 아이콘으로 이미지가 고착되었다. 해서 제이슨 시걸을 어둠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실존 작가 역으로 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기대 이상의 반전 연기력을 보여주며 배우로서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을 듣긴 했으나 월러스의 샤프함과 어두운 성정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었다고 본다. 아무리 음울을 덧칠해도 지워져지 않는 태생적 밝음이랄까;;; 작품성 측면에선 실존 인물을 소환하는 리얼리티 구현에 실패했다.
반면, 립스키 역을 맡은 제시 아이젠버그는 편집증적인 기자 역할을 얄미울 정도로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 두 주연 배우만큼이나 조연 캐스트의 라인업도 화려하다. 조앤 쿠삭, <마이 걸>의 아역 배우 안나 클럼스키, 메릴 스트립의 딸 마미 검머, 스팅의 딸 미키 썸너까지 총출연. 안정감 있는 스토리 전개에 일조한다. 작가 탐색은 이걸로 충분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 세계를 직접 경험할 차례. 킨들 사서 제일 먼저 지른 책도 <Infinite Jest>였다. 그러나 몇 장 읽다가 도무지 안 읽혀서 다른 책으로 갈아탐.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재밌다던데 에세이 먼저 읽고 소설에 도전해야 하나 갈등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