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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로 엿보는 문화투쟁_ <금서, 시대를 읽다> by 백승종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2. 12. 25. 19:47

 

텍스트의 다양성이 일정 정도 보장되는 시대를 살아감도 복된 일이다. 아직까지도 완전한 의미의 민주주의 사회는 요원한 듯 보이지만, 적어도 불온한 텍스트를 생산했다는 죄목으로 억울한 옥고의 희생자가 생겨나진 않으니 표면적으로나마 표현의 자유가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역사 속에서 지배 계층은 권력 보존의 도구로 금서의 영역을 존립시켜왔다. 피지배계층의 사고 프레임과 행동규범을 장악하는 데 장해물이 되는 저작물에 주로 금서란 레테르가 적용되었다. 즉, 금서의 양산은 지극히도 자의적이고 편협한 권위주의적 발상에 기초한다. 하여 '금서'라 함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문화투쟁을 일컫는 또다른 말이겠다. 


저자는 <정감록>, <조선책략>, <금수회의록>, <을지문덕>,  <백석 시집>, <오적>, <8억인과의 대화> 등 총 8권의 금서를 선별하여 이것들의 사회문화적 의의를 탐구한다. 8권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조명하고, 각 금서의 저자들이 택한 서사 전략을 중심으로 당대 사회에서 이룩하고 했던 저자의 의도에 주목한다. 또한 각 저자들은 전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저마다 독특한 언어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 모두 기층민의 문법에 의존하여 민중에 호소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세상을 뒤흔든 변화는 아래에서부터 비롯되어여야 함을 꿰뚫고 있었던 저자들의 혜안이 담겨 있다. 


금서는 전적으로 저자의 내적 창작욕으로부터 발로했다기보다 저자가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던 환경이 조성되었던 시대적 부름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조정래 작가가 말한 문학의 정의에서 이러한 작가적 운명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글을 반드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 의식과 사회 변혁에의 의지가 표출되어 반체제적 저작물이 탄생했고, 이는 금서라는 멍에를 지는 운명과의 분투로 이어졌다. 


독일의 경우, 분단 시대에서도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어 이념에 구애 받지 않고 동서독 간의 저작물 교환이 자유롭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는 자진 월북 및 강제 납북된 모든 문인들을 국내 문학계에서 철저히 단절시키고자 했던 과거 우리 사회의 경직된 사고와 상반된다. 역시나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김지하의 <오적>편이었다. 민주화 항쟁에 맞선 투사적 문인의 대표격으로 추앙받던 시인의 최근 행보를 둘러싸고 변절이네, 노망이네 하는 지탄의 목소리가 높다. 시대적 불운에 휩쓸렸던 개인의 궤적을 타인의 입장에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의 심경적 변화를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과 언사들을 떠올렸을 때 그가 정녕 한때 <오적>을 써내려간 깨어있는 젊은 지성이었는지 아스라한 혼란에 빠져든다. 탐욕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가리켜 오적이라 명명하고 민중의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사정없는 고함을 내리쳤던 젊은 시인이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기성 세대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텁텁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출옥 이후 일관성이 결여되어 보이는 김지하의 행보 속에서 그 나름의 일관성을 읽어내고자 노력하며 시인에 대한 애정을 뭉근히 드러낸다.  


현 시대에는 금서라는 단어조차 어색한 듯하다. 억압적 시대의 산물로 사상의 자유를 옥죄던 금서는 이제 종적을 감추었지만 여전히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권력층의 음모들이 지금도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금서란 명칭 자체는 퇴색했을지 모르나 여전히 권력층들은 교묘한 술수를 써서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뉴미디어 텍스트로의 접근을 차단하는 등 문화투쟁에 불씨가 될 만한 21세기 버전의 '금서'들을 단죄한다. 저자의 친절하고 해박한 안내에 따라 문화 헤게모니를 둘러싼 한국 근현대사를 금서라는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 보는 지적 여정은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하게 할만큼 향기로웠다. 과연 <산처럼>의 책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금서 시대를 읽다

저자
백승종 지음
출판사
산처럼 | 2012-10-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새 시대를 열기 위한 문화투쟁의 도구, ‘금서’를 다시 읽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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