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중독 코스프레

꽁꽁 싸매고 차단하는 서바이벌 게임_ 엄기호「단속사회」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4. 3. 19. 08:55

 


단속사회

저자
엄기호 지음
출판사
창비 | 2014-03-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현대사회의 과잉접속과 관계단절의 분석과 통찰!한국사회를 읽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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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위터를 마음 먹고 시작한 지 2년 정도 되었다. 철저히 시사 읽기의 창으로만 활용할 뿐 사적인 친분이 있는 자들과는 트위터를 트지 않는다. 여지껏 단 한번도 짤막하게나마 내 개인적인 감상이나 의견을 올려본 적 없다. 트위터에 매일같이 접속하지만 그때그때 공명하는 구절만을 리트윗할 뿐 멘셔닝은 일절 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내면의 추이를 온라인 광장에서 풀어놓는다는 게 불편한 탓도 있지만 행여라도 순간의 판단 착오로 '실언'이라도 해서 원치 않는 구설수에 오를 게 두려워서다. 심지어 리트윗을 할 때조차 자기 검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색이 지나치게 강한 멘션은 아무리 공명의 폭이 커도 선뜻 동의를 나타내기 꺼려진다. 의도치 않은 낙인이 찍힐 여지를 남겨 발목 잡힐 상황(?)을 자초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트위터라는 이른바 혁신적 소통 플랫폼에서 스스로 철저히 익명화된 '유령'이 되기로 선택했다.   

 

#2 

어느 순간부터 특정 인물과의 만남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 특정 관계라 하면 독백을 일삼는 자와의 친분을 말한다. 가까운 지인에서부터 멀게는 일회성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까지 일방적 성토의 장으로 대화를 오용하는 자들을 상대하는 데 이력이 났다. 상대는 안중에도 없고 켜켜이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두서없이 줄줄이 풀어놓는 것만큼 신경 거슬리는 일도 없다. 다름과 같음의 길항에서 순전한 기쁨이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대화는 이렇게 일방적인 한풀이 식으로 흘러간다. 돌아서면 소진되고 피로감만 남기는 만남들. 하여 모든 대화를 막론하고 내 차례가 와서 마이크를 잡게 될 때면 시시각각 나의 말을 점검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도 누군가에게 있어 내 얘기만 쏟아내는 몰지각한 화자인지는 아닌가 염려되기 때문이다.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니다. 말에 대한 불신과 절망이 깊어지면서 말은 무력해지고 관계맺기는 요원해졌다. 저마다 자기 세계에 유폐되어 남의 말을 경청하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사적인 경험을 고통으로만 징징거릴 뿐 공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사적인 대화가 공적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자위에만 머무르면서 토론의 장이 무너졌고 우리 스스로조차 문제 해결 능력을 회의하기에 이르렀다. 공론을 통한 해결 대신 폭로와 추문의 장이 만연한다. 바우만 식으로 해석하면 '사냥꾼의 사회'가 도래했다.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만을 최우선으로 하는 퇴행적 사조가 대두되었다. 이질적인 타자와의 만남은 꺼리고 동질성에 기인한 무리들이 모여 패쇄적인 '빗장 건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타자와의 만남이 부재한 세계에서 인간의 경험은 축소된다.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동일성에만 안주하고 안온함을 추구하게 되면서 서로 다른 세계를 잇던 가드다란 통로마저 막혀버렸다. 말을 할 줄도, 관계를 맺을 줄도 모르는 인간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차단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배틀 로얄. 자폐 사회는 이렇게 붕괴하고 있다.  

 

 

작년 여름의 초입 즈음, 창비에서 주최한 야간 인문 학교 강의를 들었다. 단행본 편집자로 이직하고자 한창 분투하던 때였고 크고 작은 '멘붕'에 시달리며 내면 닦기가 필요하던 차였다. 일천한 인문학적 소양을 보강해야겠다는 현실적 목적도 있었지만 일터에서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을 채우고픈 순수한 동기로 수강을 결심했다. 고작 4차례에 걸친 짧은 강의였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1번은 결석) 학부 때조차 맛보지 못한 학구열을 불태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경청했다. 평소 체력적 한계 탓에 퇴근 후 가까운 친구 만나는 것조차 꺼리는 나였는데, 늦은 밤까지 이어진 강의와 뒤풀이를 마치고 귀가하던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자기 단속과 소통 불가능은 단순히 심각한 사회 문제로 다뤄지는 상투적 의제가 아니었다. 내가 왜 점점 극도로 몸을 사리고 관계 맺기를 기피하는 '소통불능인'이 되어가는지 엄기호의 언어를 통해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정체 모를 우환으로 고통받던 환자에게 속시원히 병명을 밝혀준 명의와도 같았다. 비단 나만의 개별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총체적인 현상을 조명해볼 수 있었다.

 

 

담당 편집자로부터 강의 내용을 묶어 출간할 계획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드디어 한 권으로 책으로 세상 밖에 나왔다. 강의 내용은 한층 정제되고 정돈되었다. 역시 엄기호구나 하며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엄기호의 탁월함은 일상을 간파하는 예리한 관찰력과 명료한 문장력에 있다. 개별 사례들 속에서 이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짚어내고 이를 간명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힘. 그는 적어도 해외 유명 학자의 이론을 통째 가져와 '지금 여기'에 끼워 맞추는 학문적 안이함은 보이지 않는다. 끊임없이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어려운 얘기도 쉽게 풀어내는 '문턱 낮은' 인문학을 설파한다. 우리 삶을 면면이 돌아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지점들로 주조한다. 그는 '경청'과 '말걸기'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는 인류학자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