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buff 빙의

명화의 영상화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4. 5. 23. 19:37

 


천국의 나날들

Days Of Heaven 
7.9
감독
테렌스 맬릭
출연
리처드 기어, 브룩 아담스, 샘 셰퍼드, 린다 만츠, 로버트 J. 윌크
정보
드라마 | 미국 | 95 분 | -

 

 

근래에 본 영화 중에서 뛰어난 영상미로 시적 감동을 받은 작품을 꼽으라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 일흔에 접어든 노장 감독의 녹슬지 않은 감각과 내공이 응축되어 동양적 수려함의 진수를 꽃피웠다. 셰익스피어 <리어왕>으로 줄거리를 세우고 아키라식 심미안으로 외양을 입히니 어느 장면을 캡처해도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진다.

 

<란>에 이어 시각적 명치를 이토록 거세게 강타하는 영화는 오랜만이다. 테렌스 맬릭의 78년작인 <천국의 나날들>.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 게 지극히 합당한, 절세 명화들을 이어붙인 아코디언식 흐름으로 관객을 매료한다. 윈슬로 호머의 목가적 풍광과 에드워드 호퍼의 고독함이 연상되어 어딘가 익숙한 기시감이 적셔오는데 실제로 호퍼와 앤드류 와이어스의 작품에서 시각적 모티프를 가져왔다고 한다.

 

신화의 원형을 차용한 플롯. 가난한 연인이 남매로 신분을 위장한 채 어느 농장에 취업하게 되고, 남자는 자신의 여자를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지주와 결혼시킴으로써 인생 역전을 꾀하지만 종국엔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결말이다. 자연의 심오한 섭리와 인간의 유약함을 대비시킨 빼어난 영상 미학이자 1910년대 미국의 사회 발전상이 빼곡히 적힌 기록물이다. 철도가 미 전역을 가로지르고 비행기가 막 대중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산업화가 움트려던 당대 생활상을 절묘하게 용해했다.

 

신인에 불과했던 리차드 기어의 파릇했던 청춘 시절과 <몽크> 토니 샬루의 실제 부인인 브룩 아담스의 인형같이 여리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리차드 기어는 잘생겼다 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조화로운 이목구비와 드레진 허우대로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조각상이다. 원래 리차드 기어가 맡은 빌 역할로 알파치노와 더스틴 호프만이 물망에 올랐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두 사람 모두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고 이들의 현명한(?) 선택이 영화를 살렸다. 만약 둘 중 누구라도 주연을 맡았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미학적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맬릭은 편집에만 꼬박 2년이라는 장시간을 바쳤다. 영화의 높은 완성도는 절충을 용납하지 않고 완벽에 달하려던 감독의 노고가 빚어낸 결실이다. 이 좋은 걸 도저히 혼자서만은 볼 수 없는, 그래서 길 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꼭 한번 보라고 간청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