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중독 코스프레

베이즈주의자 선언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7. 8. 20. 22:58


불멸의 이론
국내도서
저자 : 샤론 버치 맥그레인(Sharon Bertsch McGrayne) / 이경식역
출판 : 휴먼사이언스 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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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yes Is Nowhere 


베이즈 정리라는 걸 머리털 나고 처음 알게 된 것이 불과 몇 달 전. 머신러닝과 알고리즘에 관한 책을 읽던 중 이 ‘불멸의 이론’과 조우했다. 세상만사 알지 못하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법. 난생처음 접하는 신상 용어인데 이상하게도 그 개념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학문 이론이란 게 본디 인간 패턴을 문자로 정돈한 것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생활 속에서 증명되지 않던가. 베이즈 정리란 용어로 공공연하게 상용되지 않을 뿐 실상 우리 삶 면면에서 발생하고 있는 명백 ‘실화’임을 깨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  Bayes Is Everywhere


베이즈 정리란 한 마디로, 선험적인 어림짐작에 근거하여 여러 판단을 정립,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객관적인 정보가 추가될 때마다 가설에 대한 믿음을 갱신하는 사후 확률 추론 방식이다. 용어 풀이를 듣고 난 나의 첫 반응이란 대개 이러했다. “아니 그럼 이거 말고 다른 방법으로도 이론 도출이 가능하단 말이냐?!” 통계학 1도 모르는 통계맹 눈높이에서조차 이보다 더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법론은 없어 보였다. (물론 별다른 접근법을 딱히 모른다는 건 비밀) 


이 친숙함은 아마도 내가 알게 모르게 베이즈 정리에 길들여져 온 ‘베이즈주의 피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서 나의 구매 이력을 바탕으로 상품을 추천하는 취향 분석 알고리즘, 스팸 메일 필터링, 포털의 검색 엔진 등 내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크고 작은 디지털 행위가 종국에 베이지안 기법으로 수렴된다. 


저자가 이렇게 몸소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했듯이 베이즈 정리는 지난 250년간의 만고풍상 세월 동안 모진 핍박과 박해를 이겨낸 막강 좀비력의 산실이다. 아무리 극강 반대파들이 외면하고 사장시키려 분투해도 은밀하게 베일을 쓴 채 역사의 주요 장면마다 미친 존재력을 발산했다. 객관성에 정초한 빈도주의가 지난 20세기의 과학을 지배했다면 21세기에 접어들며 베이즈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베이즈 추론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디지털 환경이 갖춰지면서 대규모 데이터 처리가 용이해졌고 결과적으로 베이즈 정리는 더욱 강력해진 편재성[Ubiquity, 遍在性]을 탑재, 물 만난 고기 마냥 희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  인간을 품은 이론 

베이즈 정리가 끊임없는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장구한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인간 맥박에 가장 가까운 인문 본위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가 외부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수를 교정하는 일련의 학습 알고리즘 속에서도 베이즈 정리가 작동한다. 그 자체만으로 인간을 닮아 있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스스럼없이 녹아 들어 임재했다. 


인간이 객관성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절대 지점이란 사실 전무하다. 베이즈주의자에게 진실이란 없다. 그저 가설들의 사전 확률 분포가 있고 데이터 입수 후에는 베이즈 정리에 입각하여 사후 확률 분포를 구할 뿐이다. 베이즈 정리의 시발점이 되는 주관적인 믿음만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인간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일 것이다.


베이즈 정리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한계를 두지 않는 무한 확장성이라고 본다. 통계학자 존 튜키는 “올바른 질문에 대한 적절한 근사치 답변을 비록 종종 모호하긴 하지만, 잘못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보다 훨씬 낫다. 후자의 답변은 언제나 정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377)”라고 했다. 진실이 없다 해도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그 몸부림에 가치를 두고 숭고하게 여기는 태도야말로 결과 지향주의 사회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그러나 인간이 소화 불가능한 수준으로 정보량이 범람하고 디지털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며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넘쳐나는 현 시점에서 유의미한 가설을 세운다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머신러닝이란 영역이 생겨났을 테고 인공지능이 극도로 팽배한 불확실성을 최소화시킬 구원투수로 급부상 중인데 이 도도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인간의 역할은 어떻게 재조정되어야 할 것인가는 아직도 갈 길이 먼 미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