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_ <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
하이틴 성장 영화의 모든 공식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백퍼센트 예측가능한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객관적인 평가치를 보장하는) IMDB에서 무려 8.1이라는 말도 안되는 높은 평점을 기록하고 있다. 웬만한 고전 명작도 감히 넘기 어려운 8의 벽을 넘어선 것은 아무래도 엠마 왓슨의 힘이 아니었을련지? 요즘 가만히 보면 IMDB에서 최근 개봉작들이 예상 외로 높은 수치로 선전하는 사례가 종종 보이는데(특히나 캐릭터며 줄거리며 정말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 7.9인 것을 보고 식겁했던) 이 또한 팬심 쩌는 젊은 유저들의 활발한 참여가 후한 점수 매기기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성장 영화가 되기 위해선 주인공이 절대 평범한 학생이어선 안 된다. dork, geek, nerd든지 루저로 판단되는 비주류적 기질을 반드시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평범한 학생이라는 설정을 곧 죽어도 가져가고 싶다, 그러면 불행한 가정사 혹은 말 못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기억은 필수로 탑재해야 한다. 영화 속 주인공 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popular kid인 형, 누나와 달리 극도로 내성적 성향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찰리가 패트릭과 샘을 만나게 되면서 그간 갇혀 있던 감정적 속박을 까부수고 내면적 두려움과 당당히 대면하게 된다는 구태의연한 줄거리.
제목이 시사하듯 불안한 자아에 대한 번민은 십대에게 허락된 특권이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아무 생각없이 희희낙락한 폴리애나형 청춘에게 성장통 따위가 있을리 만무하다. 내적 성장이란 유약한 영혼이 불완전한 자아를 껴앉고 두려움을 이겨냈을 때 과실처럼 주어지는 일종의 특전 같은 것이다.
찰리가 질풍노도의 불안한 자아를 극복하는 데 촉매제가 된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앤더슨 선생이다. 그는 찰리의 숨겨진 문학적 소양을 꿰뚫어 보고 자기 표현에 서투른 찰리가 왕성한 독서욕을 지피고 글쓰기로 상처를 치유하도록 독려하는 이상적 교육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고독한 아웃사이더가 내면의 상처를 글쓰기로 치유한다는 설정은 사실 진부하기 짝이 없다(얼마전 본 <처음 만나는 자유>와도 완벽히 중첩된다). 문학 역사상 개인적 아픔을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한 작가들은 수도 없이 많다. 글쓰기가 감정 정화의 기능을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비단 글쓰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아 모든 예술 활동에 적용되는 바이다. 다만, 내성적 고등학생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예술적 끼를 지니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그 모든 응축된 에너지가 제법 진지한 형태의 예술로 전환된다는 설정은 너무 '날로 먹으려는' 듯하다.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역시 음악이다. 90년 초반이라는 시대적 설정에 걸맞게 당대 유명했던 뮤지션들의 넘버원 히트곡들이 짬짬이 흘러나온다. 한 곡 한 곡 그 안에 마음을 담아 편집한 음악 테이프로 수줍은 마음을 전하며 정서적 교감과 동질 의식을 확인했던 90년대 청춘 풍속도를 여실이 재현하고 있다. 뻔한 줄거리와 인물 설정, 별 볼 일 없는 연출력도 한방에 상쇄시키는 힘이 바로 '그땐 그랬지'를 복기시키는 아날로그적 정취다.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언제든지 인터넷에 접속해서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요즘 세대에게는 쉬이 공감을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음악 감상마저도 철저히 개인 차원의 문화 활동으로 편입된 디지털 시대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너의 나'의 이야기를 공유할 턱이 없다.
덤으로 화려한 출연진을 한 자리에서 만나보는 시각적 호사도 누릴 수 있다. 찰리의 부모역을 맡은 딜런 맥더모트, 케이트 월쉬에서부터 요즘 잘가나는 헐리웃의 핫한 젊은 배우들(엠마 왓슨, 에즈라 밀러, 로건 레먼, 니나 도브레브)에다 이상적 교사 역할을 맡은 폴 러드며 영화 막판에 잠깐 얼굴을 들이미는 조앤 쿠삭까지 극강의 출연진이 총출동했다. 예전같으면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이라며 지대한 흥미와 공감도를 불사르며 봤을 류의 영화인데 나이 탓인지 큰 감흥없이 시시했다. 여러 매체에서 이미 재탕에 재탕을 거듭한 '90년대 추억팔이' 앵글에 익숙해지면서 기억을 소환하는 유희마저 피로해졌다. 누구나 한 번씩은 성인이 되기 전에 통과의례처럼 겪는 성장통과 첫사랑의 애잔함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 이 영화의 몫은 다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