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별거냐, 욕망에 충실하라_ <우체국> by 찰스 부코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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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Bukowski, Charles 지음
- 출판사
- Ecco | 2007-03-01 출간
- 카테고리
- 문학/만화
- 책소개
- This legendary Henry Chinaski novel...
찰스 부코스키는 미국 주류 문단의 이단아이자 영원한 이방인이길 자처했던 별종 작가다. 그는 통념적으로 금기시되는 영역을 쾌도난마하는 통쾌한 필치로 일상의 어혈을 뻥 뚫어 주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과연 두터운 추종자 군단을 거느리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옌롄커에 이어 숨은 진주 슬래쉬 막강한 거성을 조우하게 되었으니 다시 한 번 목청 높여 심 to the 봤다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랄까? 도무지 자기 검열이란 모르는 이 대담무쌍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어떤 새로움과 충격을 안겨줄지 사뭇 기대가 된다.
부코스키 스스로 밝혔듯이 치나스키는 작가의 실제 생이 투영된 다분히 자전적 인물이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은 <우체부>가 아니라 <우체국>란 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우체국은 단순 노동과 관료주의가 극대화된 공간이다. 치나스키란 개인 자체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 극대화를 위한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인간 소외에 방점을 찍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로 읽었다.
저속한 표현과 수위 높은 성애 묘사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 뻔뻔하고 거침없는 이 헨리 치나스키란 인물은 우리가 감히 현실에서 행하지 못했던 자유와 원시성을 발산하여 대리 만족의 쾌감을 선사한다. 도무지 책임감이나 자기 절제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삼류 인생의 루저지만,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지인을 연민하며 인간 존엄성을 실천하는 일말의 따뜻함도 지녔다.
헨리 치나스키는 바틀비와 조르바가 결합된 변종이다. 다만, 바틀비처럼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 채 홀연히 꺼져버리거나, 건강한 심신으로 무장한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이상을 표방하지도 않는다. 무장해제된 날것, 이 원시성이야말로 치나스키가 가진 최고의 미덕으로 그를 그 어떤 소설 속 인물보다 빛나게 한다. 치나스키 인생의 세 가지 키워드는 술, 여자, 도박으로 압축된다. 욕망을 충족하고 한시적 만족감을 위해 기꺼이 자기 파괴를 서슴치 않는다. 그는 결코 미래를 위해 '지금 여기'의 즐거움을 유예하지 않는다. 누군가 인생이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믿지만,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기에 현재의 행복을 반납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일지 모른다.
막독 8기 주제인 '잉여'라는 큰 틀에 어떻게 헨리 치나스키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다. 잉여의 정의는 맥락에 따라 다르겠으나, '목적 없이 쓸모 없어진 과잉분'이라는 일반적 정의를 따랐을 때 과연 치나스키가 잉여적 존재인지 다시금 고찰하게 한다.
치나스키를 사회 보장 제도에 기대어 무위도식하려는 사회적 쓰레기라곤 볼 수 없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기 밥벌이는 스스로 한다는 자립성을 어렴풋이나마 학습한 자이다. 그러나 치나스키는 노동을 신성시하지도, 노동의 효용성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있어 노동이란 그저 그가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을 마련하게 해 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사전에 입신양명이나 자아실현 따위란 없다. 일을 할 때는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맡은 바를 완수하려 하지만, 언제든 일을 더 이상 지속할 의미가 없다고 판단될 땐 과감히 노동의 의무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조직이 원하는 인재상은 묵묵히 순종하며 업무 효율성에 최적화된 부속품이다. 상명하복 체계에선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철저히 금기시된다. 설령 그러한 의문을 품게 되더라도 대다수가 생계나 사회적 시선 등의 현실적 이유로 부조리와 타협한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인생의 판을 짜길 원한다. 그러나 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태어나, 조직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순간 우리 안에 내재된 야성적 자연성은 서서히 거세된다. 사회는 질서 유지란 명목으로 조직을 개인에 우선하는 '모범 시민'을 양성하고, 기업은 통제가 용이한 '모범 직원'이 될 것을 종용한다.
하나의 사회가, 더 나아가 국가란 거대 조직이 별탈없이 굴러가기 위해선 자기 검열이 체화된 구성원만큼 편리한 도구도 없다. 그런데 치나스키는 제도권에 매몰되어 존재적 가치가 희석되는 삶을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조직의 순리를 거스르는 위협적 존재이자 필요 없는 '잉여'이지 않을까?
특별한 사전 정보나 지식 없이 펴든 책일수록 대개 만족감이 높다. 이번 역시 전혀 기대하지 않은 작품에서 신세계를 만난 듯한 전율을 맛보았다. 작가 특유의 냉소적 유머가 버무려진 이 거침없는 발군의 캐릭터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개인적으로 정말 반해버린 작품이라 평소 문화적 코드가 맞다고 생각되는 지인 들에게 선물할까 했었는데 의외로 부코스키의 거칢(rawness)을 불쾌하게 여긴 독자층이 더러 있음에 놀랐다. 역시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타인의 취향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