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이음새로 엮은 강헌의 음악사
음악평론가 강헌이라 하면 대중음악계의 걸출한 유명 인사지만, 국내 음악판에 과문한 탓에 작년 진중권의 문화다방 故신해철 특집편에서 처음 접했다.
이 책은 강헌이 2013년부터 벙커 1에서 동일한 제목으로 진행했던 강의를 엮은 것이다. 강의 녹취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텍스트라 그런지 구술하는 듯 자연스러운 내용 전개와 재담이 어우러져 가볍지 않은 내용을 잡지책처럼 슉슉 넘겨가며 볼 수 있다. 저자의 설명이 워낙 쉽고 탄탄해서 배경 지식이 전무한 독자를 위해 아니 이런 것까지 다 주석을 달았네 싶을 정도로 소상한 길라잡이를 싣었다. 어떤 페이지는 주석이 책 내용보다 더 많아 주석란이 터질 정도다.
어떤 책이든 지나친 주석은 달갑지 않다. 집중력이 낮아 열중이 쉽지 않은 특히 나같은 사람은 주석까지 꼼꼼히 챙겨서 읽다 보면 방향을 잃게 되고, 방향을 놓치면 책장을 덮게 된다. 개인 선호도 문제니 왈가불가 할 건 없지만,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주석이 빼곡히 달린 책을 보면 편집자가 기울였을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다 읽고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부채감이 든다. (그러나 일일이 다 읽기 귀찮아서 그냥 넘어간다...)
음악이라는 범주 자체가 워낙 방대하기도 하거니와 전문적으로 음악의 역사를 다루는 책들은 버거워서 정식으로 이 부분을 파고든 적은 없다. 다만, 대중문화라는 굴레 안에서 20세기 음악사는 이책 저책 깔짝대며 주워담은 얇고 넓은 배경 지식들이 주석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자를 따라잡는 데 적잖은 덕을 봤다.
칼로 도려내듯 음악만 독립적인 개체로 따로 떼어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당대 사회적 배경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면서 음악의 전복과 반전이 생겨난 연유를 논리적으로 해명한다. 클래식계에서 철저히 비주류로 소외받는 색소폰과 트럼펫 등의 관악기가 재즈의 간판 악기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과 사냥의 악기로 간주되는 관악은 형태 원리상 군악대에 가장 최적화되어 있다. 남북전쟁과 미국-스페인 전을 거치며 뉴올리언스는 병참 기지로 급부상하게 되고 폐기처분될 군수물자들이 급물살을 타고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흑인 하층민들에게 수급이 용이했다는 사회적 배경이 재즈의 전성기를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배경 지식을 덧대어 알기 쉽게 풀이만 해주는 게 아니다. 현재를 당대에 대입시켜 음악가의 일생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한다. 모차르트는 음악적 괴물 기계였고, 베토벤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 모두 평생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전하면 순탄하지 못한 길을 걸었다. 그러던 이들이 세기의 음악가로 추대되며 불멸의 숭앙을 받고 있다. 간과되어온 한국 근대 음악사를 끼워넣은 것도 눈여겨 볼 지점이다. 민비의 실체, 윤심덕 김우진의 자살음모론 등 흥미를 유발할만한 굵직한 사건들로 미끼를 던지며 식민지 근대 음악의 암울을 조심스레 벗겨낸다.
연대기순으로 음악사에 접근한 책들은 이미 시장에 차고 넘친다. 더 이상 그런 구태의연한 방식의 서술은 먹히지 않는다. 전복과 반전은 정반합을 핵심 동인으로 하는 역사의 작동 기제다. 전복과 반전이라는 대찬 키워드로 음악사를 풀어낼 생각을 했다니 참신하기 이를 데 없다. 전복과 반전을 시각화한 북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다. 전복과 반전을 이야기하는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디자인이라면 되겠는가. 흑백 대비와 타이포그래피만을 조리해서 새로움이 묻어나는 '전복'을 체현했다.
무엇을 쓰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냐도 그못지 않게 중요하다. 쉬운 말로 쉽지 않은 주제를 논하다는 것은 아마도 먹물이 고심을 거듭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지점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강헌은 정말 십점 만점에 십일점을 얹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눈높이 저자다. 친절한 저자만 믿고 그가 말하는 대로만 따라가면 된다. 이 얘기가 음악사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거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저자의 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강헌은 전언을 어떻게 풀어내야 가장 큰 울림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 적확히 꿰뚫고 있는 영민함을 지녔다.
(나를 비롯해) 개나 소나 음악을 즐긴다고들 한다. 그러나 음악의 면면을 공학적으로 해부해서 이론 지식을 쌓은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이론 지식과 감상 식견을 갖춰도 음악평론가라는 직함으로 수십년간 업계 내에서 상주하며 인정받은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그걸로도 모자라 박람강기 및 인문학적 관점에서 대중의 언어로 음악을 이토록 재밌고 야무지게 논하는 저자는 강헌이 거의 유일무이하다고 감히 말하겠다. 음악을 좋아하는 자라면 누구든 즐겨할 강헌표 음악사. 일단 사서 읽고나면 음악이 더 '잘' 들리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