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buff 빙의

폭염나기 준비 끝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4. 6. 6. 21:31

 


로렉스 (2012)

Dr. Seuss' The Lorax 
8.3
감독
크리스 리노드, 카일 발다
출연
대니 드비토, 에드 헬름스, 잭 애프런, 테일러 스위프트, 롭 리글
정보
애니메이션 | 미국 | 86 분 | 2012-05-03

 


푸른 문학 시리즈

정보
일본 NTV | 시 분 | 2009-10-11 ~ 2009-12-27
출연
사카이 마사토, 타카기 와타루, 박로미, 히사카와 아야, 노토 마미코
소개
다자이 오사무, 나츠메 소시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등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 작가들의 소설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기획으로 ...

 

심신이 고단하고 사지가 녹아내리듯한 폭풍 노동에 시달렸던 한주를 마감하며 수고한 나님을 위해 마련한 원기 회복 라운드. 책 볼 여력은 고사하고 진지하게 고전 영화를 볼 기분도 아니다. 세파에 찌든 영혼을 세탁할 유일한 방편은 동심으로의 회귀. 이럴 때를 대비해 쟁여 놓은 쓸만한 애니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로렉스>. 닥터 수스의 동화를 원작으로 하고 대니 드비토, 잭 에프론, 테일러 스위프트 등 유명인들이 대거 성우로 출연한다. 자연 생태계 파괴에 대한 염려와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교훈적 메시지가 담겨 있지만 대체로 아무 생각없이 유쾌하게 하하호호 보기 좋은 가족용 팝콘 무비. 나무요정 로렉스보다는 감초로 등장하는 곰들이 무지무지 귀여워서 실물 제작을 의뢰할 정도. 특히 식탐의 화신으로 그려지는 오동통한 애가 제일로 앙증맞긔.

 

<로렉스>로 탄력받아 평소 소 닭보듯 여겼던 일본 만화까지 포용하는 감상자의 도량. 이 여세를 몰아 지인 루트를 통해 굴러들어온 <푸른 문학 시리즈>까지도 보는 거다! 일본 영화는 고사하고 일본 만화며 소설이며 일본 관련 텍스트는 일절 사양. 일본 정서도 맞지 않지만 화풍이 일단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제 빠다를 먹고 자란 내 (편향된) 심미안으론 도무지 와닿지 않는 시각적 향미. 생각해보니 일본 문화만 그런게 아니라 영미권을 제외한 기타 모든 문화권 텍스트에 취미가 없구나... 일본 근대 문학 대표작을 선별해서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냈다고 하니 오늘같이 만사가 다 귀찮을 때 독서 대용으로 훌륭하다. 편당 20분 내외라 부담없어 좋고! 

 

첫 4회까지 일본 근대 문학의 황태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다루고 있다. 과연 첫빠로 리스트업되는 다자이의 작가적 위엄. <인간 실격>은 다자이의 자전적 소설이자 다자이 오사무스러움을 가장 현현하게 담아냈다고 여겨지는 필생의 역작이다. 명작 소설을 어찌 만화로 변화했을까 싶어 뚜껑을 열어 보니 그가 시달렸던 허무의 심연과 염세적 비애를 오싹하리만큼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형상화했다. 액자화된 다자이의 음울한 내면 세계와 그 안에서 서서히 팽창해가는 정신 분열의 파동. 종국엔 자아 붕괴로 치닫는 파국적 결말까지 실존적 사유와 죽음에 대한 매캐한 공포가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생전 일본 공포 만화를 본 적이 없으니 만화영화가 이렇게 머리털 쭈뼛서는 공포감을 자아낼 수 있다는 데 소스라치게 뜨악했다. 방금 본 <로렉스>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 편은 동화를, 다른 한 편은 근대 문학 작품에 기초하고 있으니 원작 수준에서부터 동등한 비교가 불가능한 층위 낙차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두 편의 극렬한 감상 대비 앞에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것이, 로렉스 같이 오밀조밀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포복절도 유머, 그리고 (대책없는) 낙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헐리웃 만화 문법에만 평생을 길들여진 나로선 이런 일본 만화 정서 자체가 크나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극도록 과장된 만화적 화법으로 번역된 일본 근대 문학의 정수. 젊은 예술가를 좀먹었던 니힐리즘적 불안과 초조를 대면하고 있노라니 활자로 읽었을 땐 느끼지 못했던 괴기함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서늘해진 간담에 무자비로 쪼그라든 담력. 불끄고 침대로 향하는 어둠의 찰나마저 무서워졌다. 웬만한 선풍기나 에어콘에도 무적하는 초우량 한기. 금년도 납량은 이 네 편을 돌려가며 후려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