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마이너리티 리포트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 불가한 인종 차별의 민낯. 그러나 불과 50여년전 미국 전역에서 버젓이 자행되던 만행들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특권이던 시절의 초상이다. 특정 타깃을 향한 인간의 증오심은 본디 사회적으로 학습된 기재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역사 속 끝없이 되풀이되는 살상의 잔혹사를 보면 '다름'이라는 명목으로 우열을 가리고 상하 관계를 관철시키려는 행동 양상만큼은 인간 본성의 심연에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지 않을 수 없다. <미시시피 버닝>은 말초 신경을 곤두박질하는 공포와 폭력의 적나라한 묘사로 유명한 알란 파커 감독의 88년 작품이다. 1962년 미국 미시시피 주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살인 사건을 영화화했으며 제법 진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미국 내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룬 기념비적인 텍스트이기도 하다.
(유들유들하면서 까칠한 하드보일드 형사 역의 진 핵크만의 모습은 반갑고, 젊고 윤기나는 프란시스 맥도날드의 한창 시절 모습은 더 없이 낯설다. 늘 화장기 없고 주름이 자글한 건조한 중년의 모습에만 익숙해져있던 터라 그녀에게도 이토록 젊음이 만발하던 시절이 있었다니! 세월은 무정할 만큼 가혹하다.)
프로파일링 측면에서 KKK단의 구성원들은 교육 수준이 낮고 빈곤한 백인 하류층이 큰 비율을 차지한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형편이 흑인과 큰 차이가 없지만, 그러하기에 더욱 최하층 흑인과의 비교 우위를 강조하려 했다. 흑인에 대한 증오심을 나누며 서로의 연대 의식을 구축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회복하려 했던 기형적 정체화는 구타, 린치, 살인 등의 극단적 폭력으로 발현되었다. 사회적 박탈감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를 특정 약자층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로 해소하려 했던 white trash는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는 암적 존재였다. 흰 꼬깔모를 머리에 둘러쓰고 증오의 카타르시스를 모아 내부적 유대감을 쌓는 그들의 섬뜩한 의식 거행을 보노라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불과 반백년 전에, 자유와 평등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미국에서 공공연하게 펼쳐진 인간 광기의 참상은 지금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공존과 화합이 얼마나 위태한 것인지를 시사한다. WASP로 응집된 메인 스트림은 여전히 건재하고 유색 인종의 마이너리티가 주류에 편입되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이른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한다는 샐러드 보울 사회에서 black culture만큼 독보적 특수함을 담지한 마이너리티 문화도 없을 것이다. 흑인 문화에서 공유되는 언어, 유머, 패션 등의 기호들은 그들이 차별과 압제 속에서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몸부리친 처절한 흔적들이다.
보통 미국의 마이너리티라 하면 흑인, 히스패닉, 동양인의 범주로 나누어진다. 물론 각각의 사회 맥락적 특수함을 배제한 채 마이너리티라는 단일 개념으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부조리에 설움 받는 동지애랄까. 흑인 인종 차별 문제는 바로 우리 이야기이기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미국 사회 내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의 맥을 되짚을 수 있는 두 편의 텍스트: <정글 피버>와 <미국의 아들>. 꽤 오래 전 것들이지만 이것들이 제기하는 문제 의식은 시공간에 맞게 변형되었을 뿐 여전히 시의성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