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브렉쓰루 성장 일기
근래에 본 (몇 안되는) 영화 중에서 중간 퍼즈없이 한호흡으로 끝까지 본 유일한 영화.
아주 뻔하디뻔한 구태의연한 소재와 플롯에도 불구하고
샐리 필드의 기막힌 캐릭터 소화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별할 가치가 있다.
60대 여성이 새로 들어온 아들뻘 직원을 짝사랑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로맨틱 코미디/성장 영화.
영화 장르에도 나이는 무의식적인 필요충분 조건으로 작용한다.
로맨틱 영화라 하면 대개의 경우 주인공 연령대가 20~30대 언저리를
타깃 관객 연령도 그와 비슷할 경우가 많다.
성장 영화의 공식도 이와 유사한 통념을 답습하여
십대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영화를 흔히 성장 영화라고 칭한다.
나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십대에 유의미한 '데미안'식의 성숙을 경험할 공산은 그리 높지 않다.
진정한 의미의 성장은 사실 십대를 지나 더 넓은 사회적 공간에서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도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해서 이 영화는 기존 장르 공식을 거스르는 낯설음을 구현한다.
주인공 도리스가 주름이 자글자글 폐경기도 벌써 지났을 60대 여성이라는 설정을 배제한다면
아무런 감상 포인트가 없는 흔해빠진 졸작이다.
60대 여성이라 하면 통념적으로 용도폐기된 여성, 무성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무성이라는 멍에도 억울한데 이순의 경지에 오른 성숙한 인격자로서의 면모를 강요받는다.
(나이와 정신 성숙도는 결코 비례하지 않는데도!)
도리스는 고정관념에 갇혀버린 60대 여성상을 새로이 재정립한다.
금사빠도 모자라 십대 소녀처럼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평범한 '여자 사람.'
그러나 표준의 잣대로는 '나잇값 못하는 괴상한 옷차림의 주책바가지 할머니'에 지나지 않는다.
나이가 얼마나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는 장해물인지를 되새기게 만든다.
도리스는 젊은 시절 결혼도 고사하면서까지
독신으로 어머니 수발로 평생을 바친 노처녀이다.
도리스가 hoarder로 설정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흔히 영화에서 집은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투사물로 사용된다.
어머니라는 족쇄 아래 '정도'를 가지 못하고
한평생 스스로를 희생며 살아야했던 데에서 발생하는
좌절감, 욕구 불만, 패배감 등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내면에 쌓아온 도리스의 억압된 심리 상태를 대변한다.
겉으로는 유순해보이지만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도
어렴풋이 오버랩되는 소통 불능자인 것이다.
짝사랑하던 존과의 관계가 끝내 어긋나면서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일상을 재정비,
드디어 온갖 잡동사니로 묵혀둔 집을 정리하기로 작심한다.
이는 도리스가 정신적으로 한차원
성숙된 단계로 나아갔음을 암시한다.
그밖에도 진부한 알레고리만이 즐비.
모든 게 너무나 명백해서 일방적 해석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모조리 발라버리는 샐리 필드의 미친 존재감.
샐리 필드 하면<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의
로빈 윌리엄스의 전처 캐릭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무래도 한창 리즈 시절 샐리 필드를 접하기엔 내 연령과 갭이 있어서리.)
아무리 선한 의도로 요리조리 뜯어보고 백번 양보하려 노력해도
전형적인 미인형은 절대 아닌 개성파 배우.
그런데도 이상하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소녀 같은 구석이 있다.
노년의 할머니가 되어 괴상요상한 도리스와 합체된 샐리 필드.
만년 배우의 연기 내공이 팍팍 느껴지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주변에 추천했다가 넌 이게 진짜로 재밌냐며 욕만 바가지로 먹은 영화.
와레버 난 무지하게 재밌었으니 앞으로도 쭉 추천할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