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중독 코스프레

19세기 취집 르포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4. 4. 9. 17:50

 


오만과 편견

저자
제인 오스틴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0-10-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54년 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 2002년 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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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란 단어에서 풍겨나는 근엄함은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구석이 있다. 억지로 꾸역꾸역 읽고나면 '닥치고' 칭송해야 할 것 같은 모종의 압박. 부단히 읽혀지고 회자된 역작의 위대함을 내 어찌 비루한 감상폭으로 평할 수 있단  말인가. 고전이라는 레테르는 이리도 힘이 세다. 그러나 이른바 '고전' 텍스트의 그 면면을 들춰보았을 때 가장 놀라는 지점은 지극히 범속한 인물과 서사에 있다. 세속적이라 보여지는 인간의 속살은 보편성으로 승화되어 시공간을 초월한다.

 

여성 문학의 시금석, 시공을 초월하여 가장 사랑받는 영문 소설, 18세기 영미 문학의 위대한 성취 등등  <오만과 편견>에 따라붙는 휘황찬란한 장막 따위는 깔끔하게 걷어버리자. 어깨에 힘 좀 빼고 진솔한 평을 해보자면, 오늘날 칙릿의 효시이자 일일드라마의 원형. 거창할 것도 없이 딱 요 정도가 적당하다. 줄거리는 딸부잣집의 오자매의 결혼 분투기쯤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결혼이라는 인생 최대 화두를 둘러싸고 각개전투를 벌이는 진검 통속물. <오만과 편견>만큼 수많은 형태로 차용되고 변주되는 문학 작품도 드물다. 그만큼 연애와 결혼은 모든 성인 남녀가 고민하는 삶의 과제다. 진부한 이야기를 고전으로 완성시키는 화룡정점은 작가의 유려한 필치다. 인물들은 생동하고 이야기는 쉴새없이 말을 건넨다. 인물들은 유형화되었지만 숨을 불어넣어 개성을 살려냈다. 무엇보다 오스틴 작품에는 유머가 있다. 진지한 얘기를 진지하지 않고 경쾌하게 이끌어가는 재주가 남다르다.

 

애오라지 여식들을 지체 높은 남자와 결혼시키려고 애면글면하는 베넷 부인의 부박함도 살뜰한 모성으로 읽혀진다. 여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냉소적이지만 사려깊은 부성애를 보여주는 베넷 씨에서 인간적인 가장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일편단심 순정을 바치는 다시의 충절은 고금을 넘어 모든 여자가 꿈꾸는 로망 아니던가. 다만, 주인공 베넷과 다시의 로맨스는 영 뜨뜨미지근하다.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여성을 대표하는 엘리자베스가 다시의 관심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상황적 객관화가 뛰어나고 눈치가 백단인 처자인데 자신에게 연정을 품은 남정네의 '썸질'을 놓쳤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느 정도 얼굴 반반하고 현명한 여자가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는 백마 탄 남자와 연을 맺게 된다는 신데렐라 식 결말은 오스틴 작품 세계의 한계로 지적된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오스틴 소설은 결과론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그러한 결말을 풀어내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오스틴 소설에는 여자의 심리와 다종다양한 양상의 남녀 관계가 등장한다.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여성의 고민들을 거의 모두 건드리고 있는 셈이다. 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결혼을 둘러싼 번민을 세밀한 필치로 담아내고 있어 오스틴 문학이 두터운 여성 독자층의 지지를 받으며 화수분처럼 '오스틴 현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오스틴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결혼과 인물 유형을 직조하여 결혼과 밀접하게 얽혀 있던 계급 사회까지도 외연을 넓히고 있어 19세기 초반 영국 사회 단면을 짐작할 수 있는 풍속도이기도 하다.

 

시공간이 변화해도 사람 사는 게 결국은 다 똑같지 아니하던가. 19세기를 살던 오스틴 소설 속 인물들은 외피만 다른 현대인의 복제품이다. 당대 여성들의 일상적 고민들을 들여다보면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초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계급에 따라 표준화된 삶이 근간을 이루던 신분제 사회와 개별자의 자유가 보장되는 오늘날의 결혼 풍속도가 어쩌면 이리도 닮았단 말인가! 취집은 결코 신조어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남편 잘 만나 팔자 한번 고쳐보자고' 취집에 열올리는 모녀들의 갈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고전을 읽어보겠다고 달려들었는데 잘 엮여진 할리퀸을 만난 기분이다. 그 어떤 고전보다 친근하고 가볍게 몰입할 수 있어 좋았고, 미지의 세계로 여겨졌던 '오스틴 랜드'에 발디딜 수 있어 혼자 즐거웠다. 나도 이제 어디 가서 <오만과 편견> 읽어봤다며 빵구 좀 뀔 수 있겠구나! (이렇게 술술 읽힐 줄 알았으면 진작 읽을 걸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