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시간 중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는 딴짓 탑쓰리가 있다.
1. 바탕 화면 바꾸기 (바탕 화면은 마음의 창이다. 기분 고저를 수시로 표출한다.)
2. 엑셀 셀 색깔 채우기 (다양한 색상 조합을 꾀하며 컬러리스트 놀이를 한다.)
3. 문서 서체 바꾸기 (서체도 내용이다. 컨펌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가장 공들여서 시간을 투자하는 게 아무래도 3번. 용도폐기될 문서라도 이 서체 저 서체 닥치는대로 적용해보며 문서 스타일링을 시도한다. 아름다움도 좋지만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결국엔 맨날 사용하는 서체로 허망하게 돌아오는 게 다반사. 이보다 더 하나마나한 시간 버리기 뻘짓도 없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깨알 잉여로움.
헬베티카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상용되고 사랑받는 영문 서체다. 디자인을 살뜰히도 중시하는 애플의 지정 세체이기도 하다. 엄밀히 애플은 헬베티카 계열의 헬베티카 노이에를 사용. 향후 자체 개발한 샌프란시스코로 완전히 갈아탈 거라는 풍문이 있긴 하나 와레버. 한편, MS에 기본 탑재된 서체는 에리얼. 헬베티카의 아류이자 경쟁 카운터파트로 창안되었는데 역시 형만한 아우가 없는 법이다.
사실 헬베티카는 나님이 즐겨쓰는 서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서체를 인지하는 이유는 단 하나. 예전 영어 교재를 작업할 때 기본으로 지정했던 서체가 바로 이 헬베티카였다. 당시 프로젝트 볼륨이 어마어마해서 상당 기간 헬베티카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맥락에서 사용된 헬베티카는 알아보지 못하는 미망한 1인. 자기 변호를 하자면 그만큼 헬베티카는 시선을 장악하는 뚜렷한 개성은 없지만 무심한 듯 세련되고 단정한 멋이 배여 있다.
다큐로 짜여진 본 영화는 헬베티카의 기원에서부터 출발해서 헬베티카의 과학적 아름다움, 유용성, 현장 디자이너들이 경험한 헬베티카의 면모 등 전기를 다루듯 인격화된 헬베티카를 집중 탐구한다. 2007년 헬베티카 탄생 50주년을 맞아 기념 제작되었다. 헬베티카는 1957년 디자이너 막스 미딩거와 에두아르트 호프만의 합작으로 스위스에서 출생했다. 전후 질서를 재건하고 새로운 미를 향한 갈급함을 채워줄 예술 창구로서 대중 속을 파고들었다. 시대적 소명에 충실히 복무하는 천의 창조물. 스위스 모더니즘의 아이콘으로 찬예되며 탄생 이래 쉼없는 열폭적인 지지와 추종자들을 양산한 궁극의 서체. 탄생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그 열기가 바래지 않은 타이포그래피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하스(Haas) 활자주조소의 직원이었던 막스미딩거는 자신의 서체를 Neue Haas Grotesk라고 이름 붙였다. 어떻게 읽어야할지 대략 난감한 워딩. 'Hass의 새로운 산세리프' 체라는 자기설명적 네이밍. 출신 성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과잉 정직함. 아무리 서체명이라고 해도 그렇지 너무 길고 전문적이어서 캐치하지 않다. 독일 스템펠(Stempel)사의 마케팅 손길을 거치면서 헬베티카라는 새 이름을 달고 전 세계로 보급되었다. 헬베티카는 스위스의 라틴명. 하스사는 서체에 국가명을 붙일 수 없다고 반발, 표기법은 그대로 따르되 [헬베시아]가 아닌 [헬베티카]라고 영어식 발음을 차용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서체는 글의 패션이다. 서체의 선택이 글의 얼굴을 결정 짓는다. 헬베티카는 문화예술적 맥락에서만 쓰이는 게 아니라 정치적 매락에서도 종종 사용된다. 스위스 태생에 걸맞게 헬베티카는 가장 중립적인 서체라고도 일컬어진다. 중립적이기 때문에 도화지 같은 무표저을 띤 채 무한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 조곤조곤 상냥포근한 표정에서부터 사무적이고 준엄한 표정까지 만화경처럼 다채로운 변신에 능하다. 정보 전달의 명료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심미안을 충족시키는 신통방통함. 실용주의와 장식주의를 동시에 아우르는 천혜의 스펙트럼을 내장하고 있다. 글에 어떤 옷을 입혀야 할지 몰라 난감하다면 주저말고 헬베티카를 추천. 못해도 중간은 갈 수 있으니 실로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이다.
물론 안전빵은 어디까지나 안전빵일 뿐, 최선을 뜻하진 않는다. 퀄리티까지 제고한다면, 사용 목적과 의도에 따라 적절히 변용할 줄 아는 미적 감각과 재치도 개입시켜야 한다. 옷만 갖춰입었다고 해서 스타일이 완성되진 않는 법. 머리, 화장, 신발, 가방, 장신구 등 완벽한 스타일을 연출하기 위한 고심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타이포그래피의 영역에 해당될텐데 이는 서체 선정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 고차원적 문제이므로 여기에서는 논외.
헬베티카를 사용하는 다국적 대기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나면 이 얼마나 범세계적인 미학 서체인지 자명해진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적 브랜드의 상당수가 헬베티카를 사용해서 CI를 구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