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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ch story do 'I' prefer?_ Life of Pi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3. 1. 27. 14:07



라이프 오브 파이 (2013)

Life of Pi 
8.3
감독
이안
출연
수라즈 샤르마, 이르판 칸, 라프 스팰, 아딜 후세인, 타부
정보
어드벤처, 드라마 | 미국 | 126 분 | 2013-01-01



Life of Pi

저자
Martel, Yann 지음
출판사
Harcourt Brace and Company | 2003-05-01 출간
카테고리
문학/만화
책소개
열여섯 살 인도 소년 파이가 사나운 벵골 호랑이와 함께 구명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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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꽤 장기간 외서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머물렀던 <Life of Pi>. 성긴 영어 실력으로 일독에 의의를 두고 본 작품이라 행간을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미지수다. 오래전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해 어떤 내용이었는지 들쳐볼 수조차 없게 됐지만, 인디언 소년과 호랑이가 망망대해를 표류한다는 그 아스라한 이국적 정취와 강렬함만은 아직도 선연하다.  


재작년 와우페스티벌을 찾았을 때 작가정신 부스에서 일러스트 양장본이 단돈 5000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파이 이야기> 후속으로 출간되었으나 전작의 성공에 미치지 못하고 금방 빛을 잃었던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2000원. 재고가 동이 날세라 두 권을 잽싸게 챙겨들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아무리 행사 시즌이라지만 이렇게 염가 취급을 받을 작가가 아닌데 하며 괜스레 억울했었다. 아마 출판사 측에서도 10년 묵은 베스트셀러가 영화 개봉으로 또다시 이렇게 뜨거운 주목을 받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간의 관심에서 시나브로 잊혀져간 구간 도서가 영화 개봉에 힘입어 다시금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안 감독의 탁월한 감각과 천재적 예술성으로 재구성된 스크린 속 파이 이야기는 독자가 상상했던 세계 그 이상을 너끈히 보여준다. 감독으로서 그의 천부적 재능은 이미 수많은 전작에서 입증된 바 있지만, 그의 혁혁한 시각미는 파이 이야기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안은 중국인이라는 국민적 정체성에 기반하여 오리엔탈리즘적인 동양적 신비가 아닌 동양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매 장면이 한 폭의 그림이고 예술이다.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감독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덕에 모자랄 것없이 충분한 이안 버전의 파이 이야기가 완성됐다. 


파이는 가톨릭 힌두교도이자 무슬림을 섬기는 통섭의 신앙인이다.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세계를 축조할 것인가는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한 개인의 세계관을 좌우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선택이 하나의 세계가 빚어내고 그것은 진실이 된다. 소위 진실이라 불리는 불가침의 영역은 결국 version의 다른 말이다. 제아무리 대문자 진실이 존재한들 한 개인의 세계을 지배하는 프레임은 그가 주장하는 버전의 진실이다. 내 버전의 진실과 타인 버전의 진실은 얼마든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파이는 두 가지 버전의 설을 풀어내며 우리에게 묻는다. Which story do you prefer?  그는 다다익선의 종교관을 통해 다양한 버전의 세계(진실)가 존재함을 이미 통찰하고 있었기에 어느 것 하나만이 진실이라고 종용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각자의 선택으로 남겨둘 뿐이다. 


파이 스스로 술회하듯 리차드 파커가 없었다면 그는 진즉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리차드 파커는 생존의 동력이자 생활의 긴장을 팽팽히 당기는 활시위였다.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냐는 중요하지 않다. 리차드 파커는 생의 유한성을 일깨우는 모든 불가역성에 대한 은유다. 언젠가 이 지난한 표류가 끝날 거라는 막연한 희망과 기다림. 기다림이말로 생을 지탱하는 근원적 토대가 아니던가. 누구나 각자 저마다의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기다림이 있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화의 탈을 쓰고 인생에 대해 곰곰이 반추하게 만드는 힘. 이것이 얀 마텔의 필력이고 이안의 감독적 역량이다. 무엇보다 나중을 기약하며 어디엔가 묵혀둔 원작 소설이 다시 한번 읽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