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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 문구 오덕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품위 제고랄 것도 없이 그저 생계 유지에 필요한 비품 사는 데에도 월급이 남아날 새가 없지만,
딱히 소비가 필요없던 학창 시절 문구만이 유일한 지출 항목이었다.
매 새학기가 시작하기 전이면 으레 이대 앞 아트박스까지 부러 가서 새 필기류를 장전,
새로운 출발을 위한 목욕재계를 했다.
새 펜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업되고 공부가 더 잘된다고 믿었던 단순무구의 사고회로.
막 새로 산 하이텍 펜이 어쩌다가 재수없게 교실 바닥으로 수직 낙하,
심이 구부러져 못쓰게 되면 세상이 무너질듯 비분하고,
빌려간 펜의 잉크가 손가락 두 마디는 족히 줄어들 때까지 실컷 쓰다 돌려주는 몰염치족을 비롯해서
돌려주기라도 하면 양반, 슬그머니 지껏처럼 가져버리던 먹튀족들을 온맘 다해 증오하던 그때 그시절.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접고 옷과 밥으로 관심이 옮겨져가면서 문구 오덕질과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문구가 또다시 노상 사용하는 일상 도구로 부상했지만
문구는 더 이상 취향을 표현하는 기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문구는 상비된 업무 장비에 지나지 않는다.
문구없는 회사란 실상 존재할 수 없고 찢어지게 재정이 빠듯한 소규모 회사가 아닌 다음에야
직원들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도처에 문구가 널려 있다.
게다가 지출을 최소화하고자 최대한 저렴하고 기능이 최소화된 문구를 제공하는 회사라는 공간은
문구의 아름다움와 고마움을 인지하기에 부적합하다.
그렇게 기억 속에 파묻혔던 고릿적 문구 덕심을 일깨워준 어느 지독한 문구 오덕의 문구 찬양록.
세기에 걸쳐 우여곡절 끝에 진화를 거듭하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각종 비화와 저자의 사담을 맵시나게 버무렸다.
클립, 만년필, 볼펜, 몰스킨, 연필, 지우개, 스테이플러, 하이라이터,
포스트 잇 등 문구의 대표격 선수들만 굵직하게 추려 리스트업했다.
통상적 분류에 의거한 평범한 꼭지들지만 주제별 아이템을 풀어내는 저자의 입심만큼은 범상치 않다.
런던 문구 클럽의 공동 창설자이자 '나는 지루한 것들을 좋아해( http://iamjamesward.com/ )'라는
얼토당토않은 진솔한 이름의 잉여로운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도 모자라
매년 '지루한 컨퍼런스'라는 어안 벙벙한 행사도 개최한다고 한다.
이렇게 범인같지 않은 잉여질을 하는 자이니 흔한 문구류 하나를 가지고도 독특한 관점을 견지한다.
(블로그 글을 읽을 것도 없이 슥 디자인만 봐도 상당 수준의 세련미와 예술적 감각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됨)
곧곧에 배인 시니컬한 유머와 신실한 덕심도 한몫해서 '문구의 모험'에 동참하도록 읽는 이를 독려한다.
단종된 문구의 값어치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문구에 얽힌 연대기도 치밀하게 고증하며
문구 역사가 곧 인간 문명의 역사라고까지 (대략) 확언하는 이 사람.
이 양반 웃기고 집요한 것만 아니라 기인적 행각도 서슴지 않는다.
수천 가지 용도의 탁월한 만능성을 자랑한다는 블루택의 포장지 문구에 의아해진 저자.
제조사의 웹사이트와 마케팅 문구를 총 분석해서 기능 39가지를 추출.
분명 용도가 수천 가지라고 공언했겠다, 그렇다면 보수적으로 잡아 대략 2000이라고 했을 때
39개를 뺀 나머지 1961개 용도는 대체 무엇이냐며
제조사에 과감히 따져 문의하는 용자의 휘황한 풍모.
병맛 내음이 솔솔 풍기는 에피소드를 하나둘씩 읽다면서 이 문구 오덕에 금사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보면 문구의 운명은 종이책과도 같다.
당장 손글씨를 쓸 일부터 점점 불필요해지는 이 마당에 문구의 앞날이 우려된다.
쇄도하는 디지털 기기의 포화 속에서 뒤안길로 밀려나버리는 게 아닌가 해서 애잔함이 더해진다.
그러나 전자책 단말기가 종이책의 물성을 복제하듯
상당히 많은 디지털 기기들에서 문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이메일 파일 첨부에 붙은 종이 클립, 돋보기를 단 인터넷 검색창, 오피스를 비롯
포토샵, 일러스트 등 각종 프로그램에 시각적 은유로 사용되는 각종 문구느님들.
새롭게 등장한 문구의 언어는 디지털 세계에서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준다.
실생활에서 물리적으로 사용하는 빈도수는 대폭 줄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문구느님은 우리곁에 위풍당당 임재하고 계시다.
전자책의 등장이 종이책의 멸망으로 이어지지 않듯
문구 역시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재발견되고 재창조될 뿐이다.
책이 참으로 재미나고 유익해서 술술 읽히는 건 둘째치고 문구 소비 진작에도 기여한다.
[4장 대가들의 연필]편을 보며 존 스타인벅이 사랑해마지 않았다는 블랭윙 602이 탐나
인터넷을 뒤지던 중 폭풍 점화된 물욕, 급기야 연필 대량 구매를 저질렀다.
동상님과 사이좋게 반씩 나누어 갖고
나만큼이나 연필 좋아하시는 부장님께도 몇 자루 헌납하고
연필꽂이 입구가 터지도록 새 연필 한다발을 쑤셔넣고 나니,
엄훠 책상 풍경이 다 달라보인다.
왠지 더 있어보이는 것 같다며 혼자 망상의 나래도 펼치고
펜으로 쓸 것도 괜히 새 연필을 꺼내 들고 한번이라도 더 끄적이며 분투한다.
문구가 개인의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는 데 이견이 없을지니
문구가 죽지 않을 거라는 저자의 주장은 예견이 아니라 팩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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