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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런 내용인지 미처 몰랐다. 독립 영화에 삼포 세대 얘기라고 언뜻 주워들은 게 다라, 세대 담론의 또다른 얘기인가 했지, 저소득층의 현실을 극한까지 굴착한 괴기 영화일 줄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동화 속 앨리스를 당대 현실에 대입시켜 환상적 색채를 입힌 풍자 영화가 아닐까라고 점쳤던 나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강렬한 페이소스. (엄밀히 삼포 세대를 다뤘다고 하기엔 무리수가 있는 듯) 역시나 포스터의 방점은 주인공 수남(이정현)이 앨리스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피로 흥건히 적셔신 대걸레에 있었다. 이제 보니 이정현의 저 살기 머금은 미소도 꽤나 섬뜩하다.
여성 노동자의 시선에서 사회구조적 모순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카트>와 비슷한 문제 의식을 담지하지만 서사를 전개하는 방식은 확연히 대조적이다. <카트> 역시 신자유주의 체제의 '호구'로 전락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암울을 핍진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연대 의식의 형성과 균열, 그리고 회복에 이르는 정반합 공식에 의거하여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과 긍정이 깔려 있었다.
반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일말의 낙관도 찾아볼 수 없다. 가진 것도 없고, 가방끈도 짧지만, 수남은 악착같이 야무지게 살았다. 상고 졸업 후 공장 경리로 취직해서 결혼도 하고 비록 대출이지만 내집 장만에도 성공한다. 그러나 인생은 계속 첩첩산중으로 꼬여만 갈뿐이고 의도와는 무관하게 걷찹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죄가 있다면 그저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았을 뿐인데 어느새 연쇄살인마가 되어버렸다.
수남이라는 한 개인의 인생도 비극이지만, 그보다 더한 참극은 분노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힘을 모아야 할 아군이 서로를 공격하는 몽매함의 비애다. 재개발을 둘러싼 이권 다툼은 주민들을 분열시키고 맹목적 적개심을 심었다. 어제는 이웃이었던 자가 오늘의 적이 되어버린 현실.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강퍅한 현실은 모두를 괴물로 만들었다. 없는 사람끼리 서로를 증오하고 서로를 못죽여서 안달이 난 우스꽝스러움 뒤에는 악화일로의 현실이 계속될 거라는 비관만이 잠재한다.
수남은 자신의 범죄를 집요하게 추궁하는 경찰마저 살해한 뒤, 스쿠터에 몸을 싣고 식물인간 남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간다. 희망과 절망 그 어느쪽도 확실히 암시하지 않는 열린 결말. 그러나 우리 모두 그녀의 인생이 조금도 나아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코믹으로 시작해서 호러로 끝을 맺는 현실잔혹동화. 몇몇 장면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해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이정현의 연기도 훌륭하고(아니 이 언니 늙지를 않네!) 동화를 차용한 캐릭터 설정도 참신하지만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어딘가로 향한다는 열린 결말은 성의 부족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앞에서 기껏 공들여 쌓아 놓은 감응탑을 일순간 다 깎아먹는 자충의 매듭. 이게 최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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