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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buff 빙의

비긴 어게인 - 이유불문 머스트 씨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4. 9. 8. 21:33

 


비긴 어게인 (2014)

Begin Again 
8.9
감독
존 카니
출연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애덤 리바인, 헤일리 스타인펠드, 제임스 코덴
정보
로맨스/멜로 | 미국 | 104 분 | 2014-08-13

 

 

2000년대 SNS의 선구자 격이었던 싸이가 이젠 끝물이라 칭하기조차 열없을 정도로 황폐해졌다. 싸이가 한창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마치 전국민을 일촌으로 엮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초창기 무렵에나 바짝 미니 홈피 가꾸기에 열을 올렸지,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귀차니즘으로 미련없이 접어버린 1인. 내 홈피 따위 팽한지 오래여도 간간히 일촌 순례는 게을리 하지 않던 시절, 이집저집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영화 <원스>의 사운드트랙 <Falling slowly>를 홈피 배경 음악으로 내걸던 탓에, 죄없는 방문자는 글렌 핸사드와 마케타 잉글로바의 처연하면서 사연 많아 보이는 화음을 아주 귀에 생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많은 이들이 기존 메이저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참신한 캐릭터와 담백한 감성에 감응하며 <원스>에 열광했지만, 정작 난 남녀 주인공의 가슴 저미도록 궁색한 사랑 이야기가 그리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이 실력의 고하를 떠나 아이리쉬 특유의 진한 음울이 배어 있는 남녀 주인공의 음색은 들을 때마다 기분 축축 처지게 만드는 침윤성이 있다.

 

<원스>로 무수한 신봉자를 거느리며 차기작을 한껏 기대하게 만들었던 존 카니가 신작 <비긴 어게인>을 들고 나타났다. 이번에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러팔로도 모자라 머룬 5의 애덤 리바인까지 등에 업고 <원스>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라인업을 내세우고 있다. 일단 <원스> 하면 미니홈피 배경음악을 비롯해 사방팔방에서 지겹도록 들어야 했던 징글징글암부터 떠오르는 데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러팔로의 조합이라... 둘 다 지대로 비호감이네. 난 무조건 배우 위주로 영화를 골라보는 편협한 관객이기에 이 영화를 부러 볼 일은 절대 없겠구나 싶었다. '<원스> 감독의 로멘틱 멜로디'라는 포스터 문구가 무색하게 저 두 스타급 배우가 풋풋촉촉한 비주류적 <원스>의 심상을 재현했으리란 기대감 제로, 남녀 주인공 카운터파트로도 전혀 매치되지 않으니 그저 총체적 부조화로 다가올 뿐이었다.

 

그런데 즐겨듣는 영화 팟캐스트의 혹평가 군단이 <비긴 어게인>의 높은 완성도를 칭송함과 함께 두 배우의 열연을 극찬하는 게 아닌가! 키이라 나이틀리의 기대 이상의 수준급 노래 실력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고 덧붙이고 있다. 칭찬에 인색하고 비판에 후한 이들이 이 정도까지 언급했다면 이거슨 거두절미 머스트 씨 영화! 어머 이건 꼭 봐야 돼!를 외치며 당장 관람 실시.

 

역시나 그들의 말을 듣기 백번 잘했다. 영화도 영화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록 쉽사리 여운이 가시지 않는 찰진 사운드트랙. 여전히 주인공들은 가진 것 하나 없이 변변찮은 세속의 '루저'지만 <원스> 기저에 깔려 있던 우울의 심연과는 떠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뉴욕으로 옮겨진 무대는 밝아졌고 음악은 한층 경쾌해졌다. 명불허전 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러팔로는 캐릭터에 스며들어 더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애덤 리바인도 본업 수준에는 못미치지만 대체로 나무랄 데 없는 '나쁜 남자' 역을 무난히 소화해냈다. 연기를 한 게 아니라 그냥 현실에서 평소 하던 그대로를 보여준 듯... 무엇보다 키이라 나이틀리에게 이렇게 고운 음성이 숨겨져 있었다니! 평소 건조한 목소리를 내던 장윤주가 소녀처럼 가녀리고 맑은 음색으로 노래하는 걸 처음 들었을 때 놀라움이 바로 이러했다. 천상 퉁박스런 영국 여자처럼만 보이던 키이라 나이틀리가 여리여리한 목소리로 한가락을 뽑아대며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선한 창법을 구사하고 있다!!(오 지쟈쓰)  

 

그리고 비중은 작지만 크레딧 맨 마지막을 당당히 장식할 정도로 거대 존재감을 뿜는 캐서린 키너, 이 언니는 언젠가부터 전처 전문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대가 세고 앙칼진 이혼녀 역할을 일관성 있게 보여준다. 십대 사춘기 딸을 맡아 열연한 헤일리 스테인필드 또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될성 부른 떡잎의 모범을 걷고 있는 헐리웃의 존예 꿈나무. 어쩜 얘는 마의 16세 따윈 개나 주고 나이를 먹을수록 미모 포텐이 터지고 있는지, 애비게일 브레슬린에 이어 완소 미녀로 점지했다.

 

이 영화의 가장 탁월한 지점은 120분의 러닝 타임 내 사랑이나 성공, 혹은 이 둘 다를 성취해야 한다는 서사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는 한물 간, 그러나 실력만큼은 아직 녹슬지 않은 음반 프로듀서 댄(마크 러팔로)의 도움으로 데모 테잎을 완성하지만 메이저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는 성공 신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를 따라 뉴욕에까지 왔건만 유명 가수가 된 후 바람을 핀 전 남자친구 데이브(애덤 리바인)와 재결합하는 눈먼 순정 또한 보여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도시의 외로운 영혼으로 조우한 댄과 그레타가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뻔하디뻔한(그러나 <원스>에서는 일어났다!) 상투 로맨스도 없다. 음악을 매개로 타인과 교감하고 음악에 의거해서 세상과 맞서는 '음악쟁이들'의 흥취만이 가득하다.

 

업계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남자와 연인에게 배신 당한 여자.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이들을 극화시켜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음으로써 감수성을 정제한다. 이들의 상처를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겪는 한시적 고비 정도로만 묘사할 뿐 훌훌 털고 일어나 음악으로 재기하는 순간적 희열에 주목한다. 과연 음악은 나와 남을 잇는 다리이자 다시 일어설 힘이 되어주는 강장제와도 같다. 감미로운 선율과 꾸밈없는 서사를 버무려 <원스>의 기조를 면면이 유지하되 색다른 연출과 인생에 대한 담담한 시선으로 오감을 적시는 한 편의 파릇한 악보같은 영화! 올 가을 머스트 씨라고 자신있게 강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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