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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buff 빙의

오감을 간질이는 존 파브로의 <쉐프>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4. 9. 21. 14:51



셰프

Chef 
8.1
감독
존 파브로
출연
존 파브로, 소피아 베르가라, 존 레귀자모, 엠제이 안소니, 스칼렛 요한슨
정보
코미디 | 미국 | 114 분 | -



<아이언 맨>의 감독으로 이제는 더 친숙한 존 파브로. 그러나 배우로 시작해서 각본에서부터 감독 및 제작까지 저변을 넓혀오며 잔뼈를 키워온 알짜배기 실력파다. 파브로는 각본, 감독, 제작에서부터 주연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을 도맡아 백퍼센트 시그니처 작품을 만들었다. 



Back to Your Roots 

주로 독립 영화 진영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아이언 맨>을 통해 일약 블록버스터 영화계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뿌리는 독립 영화에 있음을 이 영화를 통해 갈파한다. 극중 주인공 칼(존 파브로) 역시 푸드 트럭 장사꾼에서 LA의 유명 레스토랑 쉐프로 성공해서 유명세를 얻게 되지만 요리로 순전한 기쁨을 잃은 채 사장이 원하는 메뉴만을 기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갑갑한 현실에 공허한 염증을 느끼게 된다. 해서 고향 플로리다로 돌아가 푸드 트럭을 얻어 쿠바 샌드위치를 팔면서 요리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이 가득했던 밑바닥 시절의 초심을 되찾기에 이른다. 자본이나 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열을 불태우는 일상은 비단 셰프에만 국한되지 않은 모든 예술가들의 이상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소피아 베르가라, 존 레귀자모, 스칼렛 요한슨, 더스틴 호프만 등 내로라 하는 유명 배우들의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아이언 맨>의 주연 배우들이 기껍게 헐값의 우정 출연을 했으니 오랫동안 업계에 있으면서 두텁게 쌓아온 인맥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걸출한 출연진을 포스터 전면에 내세우며 독립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제작사의 작품처럼 인식되는 것 또한 파브로의 마케팅적 계산에서 나온 전략 아닌 전략이다. 


그러나 <엘프>, <자투라>, <아이언 맨 1,2> 등 탄탄대로 상업적 대성공을 거두면서 막대한 자금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게 가능할 수 있었다. <쉐프>는 저예산 독립 영화지만 파브로 개인이 추동했던 작품이었던만큼 자금적 여유 없이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기본적인 물적 토대와 영향력이 확보된 상태에서 이제는 그 누구의 간섭이나 입김 없이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철저히 자족적인 무소부재의 작품을 만들 시점이라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비주류 영화계에서 시작했던 본인의 뿌리를 되짚고픈 개인적 다짐도 한몫했을 터이므로 자족적임과 동시에 존 파브로의 실재 삶이 투영된 자전적 영화이기도 하다. 



Make Each Dish Your Masterpiece

<쉐프>는 고급 음식점에서 현란하게 프리젠테이션된 음식만이 최고가 아니라고 일침한다. 음식에는 고하가 없다. 요리하는 사람의 마음과 열정만 가득하다면 일상 음식도 얼마든지 최고가 될 수 있다. 칼이 아들에게 그릴드 치즈를 만들어주는 장면은 이러한 요리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글거리는 사운드가 깔리고 적당히 토스트된 빵 사이로 흥건히 넘쳐나는 치즈는 관객을 미각적 흥분 상태로 몰아넣는다. 평범한 아침 식사에도 예술적 혼을 담아 요리하는 칼의 장인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파브로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푸드 포르노'를 재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로이 초이의 공이 컸다. 로이 초이는 Kogi BBQ Taco 트럭을 전매특허로 이름을 알린 한국계 미국인 요리사다. 한국이라는 자신의 민족적 원류와 자신이 성장한 라티노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코리안 멕시칸이 융합된 L.A. 퀴진을 선보였고 인디 요식업계에서 스스로를 브랜드화하는 데 성공했다. 로이 초이에게 사사받은 파브로는 극중 캐릭터에 걸맞은 전문가적 손놀림과 요리 신공을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이 보여준다. 







Social Media Spices up the Story

<아이언 맨>에서 이미 입증된 바 있듯이 첨단 과학 기술과 매체 변화에 밝은 파브로는 소셜 미디어를 삽입시켜 서사에 시의성을 보태고 있다. 대개의 기성 세대가 그러하듯이 칼 역시 아들로 대표되는 요즘 세대와 달리 트위터나 페이스 트위터 등의 소셜 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은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트윗팅에 서툰 칼은 자신의 요리를 가차없이 격하한 비평가(올리버 플래트)와 의도치 않은 설전을 벌이게 되고 이는 급기야 사장과의 갈등을 심화시켜 셰프직을 그만두게 되는 도화선이 된다. 칼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문제의 음식 비평가를 찾아가 수위 높은 대거리를 하는 장면은 실시간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가 유튜브에까지 업로드된다. 그리고 여행길에 동행한 아들은 푸드 트럭의 궤적을 실시간 트윗팅을 통해 만천하에 알리는 견인차 역할을 자처하고 덕분에 칼의 푸드 트럭은 정차하는 곳마다 열화와 같은 손님몰이를 하는 기록적 행보를 남긴다. 소셜 미디어로 실직하지만 소셜미디어로 재기하는 21세기의 신역설. 트위터와 유튜브, 그리고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소셜 미디어가 요식업의 생사를 쥐락펴락하는 막강 파워를 가지게 됐음은 물론이고 더 이상을 이를 배제하고선 마케팅을 논할 수 없다는 현실 변화를 날줄과 씨줄로 교직했다. 



All about Authenticity 

파브로가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진정성(authenticity)이다. 그는 <Dinner for Five>를 제작할 당시에도 진정성을 지키고자 힘썼다. <Dinner for Five>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되었던 쇼프로그램으로 시즌 4를 기점으로 막을 내렸다. 파브로가 호스트로 나서고 매회마다 네 명의 헐리우드 배우군을 초대해서 저녁찬을 즐기면서 쇼비즈니스 비화 및 오프 더 레코드 개인사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놓는다는 컨셉의 리얼리티 쇼다. 파브로는 쇼의 리얼리티와 함께 진성성을 온전히 살려내기 위해선 반드시 해가 진 저녁 이후에 실제 식당에서 촬영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고집했다. 유명 배우들의 스케줄을 조율해서 한 자리에 불러모은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지극히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그래서 제작 편의를 해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파브로는 진정성을 보존하기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최우선 조건으로 삼았다. 


파브로의 진성성 철학은 <셰프>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셰프>는 전형적인 로드 무비의 구조를 띠고 있다. 푸드 트럭을 몰고 즐겁게 표류하는 세 남자의 요리횡단기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극중 장소가 실제 촬영지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는 건 공공연히 알려진 기정 사실. 파브로는 한 장소에서 세팅만 바꾸어 손쉽게 촬영을 마칠 수도 있었지만 결단코 일시적 편의를 위해 작품 전체의 내적 완결성을 포기하는 미욱함을 범하지 않았다. 뉴올리언스와 텍사스에 장소를 옮겨 현지 촬영을 (물론 물리적으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만!) 감행했고 그 결과 리얼리티가 풍성한 로드 무비가 완성될 수 있었다. 



Sensual Experience Says It All

적잖은 비평가들이 이 영화에 뚜렷한 갈등 구조가 없다는 것을 서사적 결함으로 지적한다. 주인공 칼의 내적 갈등은 다소 싱겁고, 소원했던 아들과 부자 간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은 자못 심심하며, 전처(소피아 베르가라)와의 재결합은 지나치게 급작스럽다. 헐리우드 생리에 빠삭하고 한두 번 글 써본 초짜가 아닌 파브로가 이런 빈틈을 놓쳤을리 없다. 파브로는 이 영화의 방점이 기승전결이 뚜렷한 자극적인 서사가 아니라 오감을 적시는 감각적 유희에 있다고 말한다. 파브로에게 있어 영화란 시각에만 편향된 일차원적 매체가 아니다. 장면 하나에도 오감을 전율하게 하는 감각적 세례로 장식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사운드트랙 역시 파브로 영화의 핵심 시그니처 중 하나다. 파브로는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을 선정하기 위해 각고의 고심도 마다하지 않는다. <쉐프>를 처음 봤을 때 먹음직스러운 음식의 향연 못지 않게 큰 감상적 즐거움을 안겨줬던 부분도 바로 미학 시너지를 증폭하는 사운드트랙이었다. 실제로 파브로는 영화보다 사운드트랙에 더 많은 돈을 썼다고 공언한 바 있다. 영화에서 음악은 그 하나만으로도 장면적 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심상의 풍경마저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결정적 요소다. 파브로는 음악의 영향력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고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하는 출중한 디제이기도 하다. <쉐프>에서의 최고 명곡을 꼽으라면 Liquid Liquid의 <Carvern>. 영화 기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루브한 테크노 사운드를 매끄럽게 녹여낸 것도 존 파브로만의 탁월한 감각이다. 





존 파브로는 연기면 연기, 글이면 글, 감독이면 감독, 어느 한 군데 모자람없이 없이 다재다능한 쇼비즈니스 맨의 전모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관객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줄 아는 고도의 평형 감각을 소유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적 지향점과 소신을 지켜내면서 관객의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세심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는 기민한 감각과 예술적 감수성을 키워왔다. 타성에 젖지 않고 계속해서 한 우물을 깊고 넓게 파온 덕분에 그 흔한 불미스러운 사건사고나 부침 하나 없이 모범적 영화인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또 어떤 변신으로 찾아올지 늘 기대가 되고, 그 기대치를 크게 벗어남없이 놀라웁다. 내 이러니 존 파브로를 숭앙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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