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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우연히 이들에 대한 기사를 보고 꼭 한번 읽어 보고자 다짐했던 책이었다.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주는 안온함을 과단히 버리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닮은 삶을 행하는 세 모녀의 녹색 생태일지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 넌덜머리 나고 그래도 남들 하는 거 다하고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일에도 신물이 나던 차, 나의 과열된 피로함을 얼마간 해소시켜준 청량제와도 같았다. 'Less Is More'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물질적 풍요 속 정신적 빈곤에 염증을 느끼고 물질적 빈곤 속에서 정신적 풍요를 희구하는 자라면 특히나 더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대책없이 귀농에 대한 환상을 주입하거나 노골적으로 페미니즘 사상을 늘여놓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만끽하는 자유로움의 실체를 가감없이 담담히 풀어낼 뿐이다.
책의 질감이나 내지 구성 등 에코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저자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세심하게 반영한 디자인이 참 마음에 든다. 엄마 도은이 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간간히 두 딸, 여은과 하은의 일기를 삽입하여 중년, 청년, 소년의 시각에서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다가오는 자연적 삶과 자유를 변주한다. 도은, 하은, 여은 이 모두를 저자로 전면에 내세워, '세 모녀가 들려 주는 에코페미니스트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차별화된 포지셔닝으로 독자의 오감을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인다. 두 딸 모두 제도권에서 이탈하여 자유를 만끽하고 스스로 자발적 배움을 실천하는 환경적 수혜 속에서 성장한 덕에 웬만한 성인 못지 않은 유려한 글솜씨와 지적 통찰력을 보여 준다. 획일적 교육과 입시 위주 풍토에 매몰되어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지적 무방비 상태로 성년을 맞이했고 그만큼 정신적 방황도 길었다. 그래서 더욱 이반 일리히가 주창한 '학교 없는 세상'에서 배양된 이들의 정신적 단단함과 열린 사고가 마냥 부럽다.
교육의 핵심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주는 데 있다.
이미 '배운' 인간이 아니라 계속 배워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란 할아버지도, 엄마도, 아빠도, 아이도 모두 배우는 사회이다.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135)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고 지식,기술, 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서로 도와주는 순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교육망 형성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이반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142)
얘들아, 우리는 아마추어로 살자꾸나. 아마추어는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단다. 우리는 뭔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이 지구를 사랑하고 생명 있는 것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보자. (144)
기본적으로 분에 없는 사치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물질과 소비가 안겨다주는 안락함에 너무나도 깊숙히 젖어 있기에 내 생활을 지탱하는 온갖 잉여적 소비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멘탈에 균열이 감지되면 사고 싶(지만 꼭 필요는 없)었던 옷을 사고, 책을 산다. 사고 싶었던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얼마간 스트레스를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또다시 극한의 스트레스가 엄습하면 또다시 지갑을 열어 너덜해진 멘탈을 어른다. 미봉책적 치유는 마약과도 같아 금세 밑천이 드러난다. 소비와 소유를 오가는 고리가 되풀이될수록 정신도 시나브로 황폐해진다. 물질과 소비는 멘탈 치유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갖고 싶은 건 꼭 손에 넣어야 행복해질 거라는 망상에 시달리게 하며 일상을 장악한다. 하루에 디폴트로 섭취하는 영양제와 건강식품만 해도 수종이고, 제철 아닌 과일은 웃돈을 줘서라도 매일 일정량을 섭취해야 한다고 집착한다. 가고 싶은 맛집이 생기면 약속을 만들어서라도 꼭 맛보아야 하니 앵겔 지수는 매달 최고치를 갱신한다.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찍어 발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화장품이 수종이요, 매월 품위 유지(?) 명목으로 소소하게 사들이는 옷가지만 해도 이미 옷장에 차고 넘친다. 여행은 고사하고 친구 집에서의 1박도 별로 반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내가 필요하다고 믿는 이 모든 것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활의 불필요함을 최소화하고 없으면 없는대로 간소화된 삶을 추구하는 세모녀의 생활 철학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simple abundance의 전범이다. 그러나 푼돈 아낄 줄 모르고 쓸데없이 낭비를 일삼는 타성의 족쇄를 까부술 수 있을지에 대한 끝없는 회의가 밀려든다.
조만간 더 늦기 전에 귀농의 꿈을 이루고 말겠다고 거의 습관적으로 읊조리고 있다만은, 사실 내가 말하는 귀농은 일반적 귀농의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사실 시골에 사는 친척 하나 없으니 농촌의 실상이 어떠한지조차 알지 못한다. 귀농보다는 은퇴 후 외곽으로 나가 전원주택이나 별장을 지어 살겠다는 편에 더 가깝다. 단지 은퇴해서가 아니라 젊어서부터 자연을 벗하며 살고 싶다는 점만이 다르다. 그저 내 손으로 소소하게 작은 텃밭이나 일구면서 내 손이 거쳐간 결실들로 매 끼니를 알콩달콩 장식하고, 자연 풍광을 곁에 두고 유유자적하는 부르주아적 삶이 내가 그리는 귀농의 모습이다. 어느 정도 물질적 여유가 보장된 상태에서 도시를 떠나 여가생활이나 하며 살겠다는 거지 농촌으로 회귀해서 삶의 터전을 모조리 다시 세우겠다는 결연함은 없다. 지금으로선 그럴 자신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세 모녀가 몸소 실천하는 자연적 삶은 언감생심일뿐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우리 모두 운명적으로 귀속된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굴레 속을 살아간다. 부지불식간에 나를 주조하는 구조적 외압에 거스리기 위해선 각고의 의지와 희생이 따른다. 그냥 남들 사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더 편한 것은 당연지사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젊은 시절 품었던 원대한 이상은 점점 잊혀지고 세상과 타협하며 '먹고살기' 또는 '더 잘 먹고살기'만을 위해 하루하루를 산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처럼 짜여진 규범적 틀에서 벗어난 비주류적 라이프 스타일을 여전히 재단하는 통 속에서 대세가 아닌 신념을 고수하기란 더욱 큰 결단이 요구된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한 그들의 분투는 더없이 위대하다.
세 모녀가 택한 극단적(?)인 삶만이 정답은 아니다. 잉여적 소비는 조금씩 줄이고, 자연생태를 고려한 의식적 소비를 하며, 물질에서 위안을 얻는 병리적 기제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자연과 가까운 삶을 구현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완벽한 이상에 도달하지 못할지언정 이를 추구하는 그 여정만으로도 충분히 값지고 아름답다.
무엇보다 '없이 살기'를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몸과 마음의 감각을 깨어나게 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기계들과 물건들에 둘러싸여 분주하고 정신없이 지내지 않게 되면, 자기 안에 침묵과 고요가 찾아온다. 이 침묵과 고요가 누군한테는 끔찍한 공포일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이걸 극복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의 가장 험한 봉우리를 넘은 셈이다.
이 고요 속에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만나본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과도 친밀하게 만나본다. 자유롭고 생명력 있는 삶은 가능성을 만나보는 것이다. 인간의 폭력이 미치지 못하는 저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세계와 교감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224)
이중에서 내가 가장 추구하고 싶은 나는? '스스로 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로워지는 자'이다. 나는 이 문명사회의 복잡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을 때가 많았다. 그렇기에 자발적 가난뱅이 생태주의자처럼 단순한 삶과 자립의 능력을 갖게 되길 꿈꾼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꿈꾸기만 한다. 내 삶에 여전히 한계가 많고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한계도 무시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이 시대의 자식이다. 그래도 꿈꾸고 추구한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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