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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 듬뿍 바른 디즈니와 양극단의 스타일을 표방하는 구라파 애니메이션. 담백한 수채화 한 편을 보는 듯한 가벼운 화풍이 명랑하다. 호들갑스런 디즈니 설레발에 피로해진 감상 회로를 정제시켜주는 천혜의 청정 만화. 주변부를 페이드아웃시키고 포커싱한 대상만을 강조하여 묘사하는 미니멀리즘에 충실히 입각한다. 프레임을 양껏 꽉꽉 채워 최대한 현실과 흡사한 시뮬레이션 축조에 공들이는 디즈니와는 정반대다.
곰과 생쥐로 양분된 세상, 지하에는 생쥐가, 지상에서 곰이 거취한다. 암묵적으로 불가침 대항을 이루며 이로써 유지되는 질서가 곧 평화이고 절대적 순리로 통용된다. 서로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불구대천지 천적 관계. 각 세계의 아웃사이더로 대표되는 어네스트와 셀레스트가 우연한 계기로 뭉치면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2인조 위법단이 탄생했다. 통념에 사로잡혀 금기시되던 영역에 반기를 들고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우화로 소비되기엔 날카로운 냉소가 서려 있다.
렛잇고가 서서히 끝물을 타며 잊혀져가는 지금,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은 <겨울 왕국>에 견주어 전혀 뒤지지 않는 퀄리티를 보여준다. 유일하게 디즈니에 뒤쳐지는 지점이 있다면 범세계적으로 물심양면 빵빵한 마케팅을 지원하는 자금력 하나가 아닐런지.
<겨울 왕국이>이 애니 사상 천만 관객을 돌파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는데, 내가 본 영화가 그 영화가 맞나 하는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어느 것 하나 신선하지 않고 바람빠진 유머들은 따분하다. (이런 새털같은 텍스트에 열광하는 대중 심리에 더욱 뜨악한다.) 무엇보다 인종 차별적 주인공 설정과 여성을 대상화하고, 비현실적 신데렐라 로맨스를 주입한다는 등등 그간 비판의 대상이었던 디즈니표 스테레오타입을 까부수기 위한 용트림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비현실적 서사 공식을 모조리 정반대로 뒤집은 결과, 디즈니가 낯설어졌다.
웰빙 시류에 맞게 건강 메뉴를 도입하며 탄력적 변신을 거듭해온 맥도날드의 마케팅 전략처럼 디즈니로선 생존을 위한 필연적 변화였다. 전통적 노선을 고수하기엔 시대에 뒤쳐진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테니 21세기에 합치하는 만화로 개조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게다. 학문적 관점은 차치하고 오로지 만화가 선사하는 즐거움만 놓고 보자면, 뻔뻔하고 재수없던 디즈니가 훨씬 더 오락적인 재미가 충만했다. 디즈니의 온갖 불량 성분 -백인우월주의, 남녀 차별, 자문화우월주의 등등- 을 맛나게 섭식하며 성장한 '디즈니 키드'로서 이런 식의 리뉴얼은 영 달갑지 않다. 한마디로 맛이 없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지점은 지나치게 완벽한 그래픽 효과다. 화풍 면에선 <인어공주>, <알라딘>, <뮬란> 시절의 디즈니가 단연 갑이다. 지금보다 덜 섬세하고 현란했을지 몰라도 디즈니만의 아날로그적 동화 감수성이 잔재했다. 그때는 만화가 만화다운 맛이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기술 발달로 말미암아 구현력은 진일보했지만 천진난만함한 감수성은 실종됐다. 사람이 '사람 냄새'가 나야 정감이 가듯, 만화도 '만화다운' 맛이 있어야 하지 않나. 현실을 완벽하게 모사한 만화에는 실리콘 냄새만이 풀풀 날린다.
다시 <어네스트와 셀레스트>로 돌아와서 딴죽 하나를 걸자면, 왜 주인공 곰은 남자고, 주인공 생쥐는 여자여야 하는가. 정반대였더라면 오히려 더 신선하지 않았을까. 쨌든 간에 이런 유니크한 만화가 경박스런 렛잇고 따위에 묻혀버렸다니 통탄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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