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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중독 코스프레

프리퀄이면서 시퀄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5. 11. 4. 23:01

 

파수꾼
국내도서
저자 : 하퍼 리(Nelle Harper Lee) / 공진호역
출판 : 열린책들 201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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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이후 '사회적' 절필을 고수했던 하퍼 리. 예상치 못한 엄청난 부와 명성을 한번에 거머쥐면서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녀의 차기작을 염원하던 전 세계 독자들을 광분으로 몰아넣은 천의 낭보. 하퍼 리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아흔을 넘긴 하퍼 리가 새로 집필을 한 건 아니고 그간 꽁꽁 묵혀두었던 작품을 이제서야 내놓은 것이니 엄밀히 말해 낡은(?) 신작이다.

 

난 하퍼 리의 팬도 아니고 <앵무새 죽이기>의 팬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앵무새 죽이기>는 각별한 책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완독한 성인 단행본 원서가 <To Kill a Mockng Bird>였다. 고등학교 시절 학원 선생님의 제의로 시작한 도전 <앵무새 죽이기>! 아무리 또래보다 영어를 한다 해도 원문을 완벽히 이해하긴 턱없이 부족한 실력. 그럼에도 원서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지적 허세에 심취했다.

 

학원을 그만두고도 혼자서 어찌어찌 마지막 장까지 가까스로 진출. 읽었다고 하기보다 철자를 '보았다'고 하는 편이 맞다. 못내 찜찜함을 달래기 위해 집에 굴러다니던 우리말 번역본도 찾아 읽었다. 다른 책을 읽는 듯한 기분... 언제 이런 대목이 있었냐며 수도 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말로 봐도 영 무슨 재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원작 소설 못지 않게 유명한 게 바로 영화 버전. 원작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각색시킨 수작이다. 그레고리 펙과 메리 배드햄의 신공에 찬 연기를 보는 감상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스카웃 역의 메리 배드햄의 기 찬 연기력! <페이퍼 문>의 테이텀 오닐 이후 이토록 잔망스러운 아역은 처음 봤다. 소설보다 영화가 훨씬 더 재밌었던 몇 안되는 케이스.

 

<앵무새 죽이기>는 소녀 스카웃의 1인칭 시점에서 인종 차별이 팽배한 미국 사회를 우회적으로 고발한 성장 소설이다. <파수꾼>은 뉴욕으로 떠났던 스카웃이 스물 여섯 성인이 되어 고향 앨러버마 메이콤으로 귀환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스토리 상으론 명백한 시퀄이지만, 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보다 앞서 집필했던 작품이 바로 <파수꾼>이다. 주인공 스카웃의 연령대를 어린이로 낮추고 1인칭 시점으로 서술 방식을 바꿔보라는 담당 편집자의 권고로 탄생한 게 <앵무새 죽이기>. 작가적으론 프리퀄이지만, 작품적으론 시퀄이 되는 역설적 비화가 깃들여져 있다.

 

<앵무새 죽이기>는 신화적 요소가 다분한 사회적 교본으로서 오랫동안 군림해왔다.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는 인종 차별이 뿌리 깊게 잠재된 미국 남부에서 찾아보기 힘든 백인의 이상을 상징한다약자의 편에서 서서 정의를 구현하고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변호사의 소임을 다하는 양심적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파수꾼>이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애티커스의 신화성이 무참히 박살나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스카웃은 흠결 하나 없이 완벽한 도덕 군자의 화신으로 섬기던 아버지에게서 권위 의식과 인종 차별주의적 태도를 발견하고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된다. 기성 세대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려하지만 현실에 맞서 변화를 일구어내는 실천적 삶을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식의 대략 교조적 결말.

 

많은 이들이 애티커스가 변한 게 아니라 스카웃이 성인이 되면서 애티커스의 참모습을 직시하게 된 거라고 해석한다. 작품성 여부를 떠나 완전무결한 애티커스의 재발견이라는 구도 자체만으로도 구미가 당겨지는 작품이다. 스카웃은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을지, 그녀의 가족과 동네 주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등등 50년 동안 박제되었던 핀치 가족의 후일담이 궁금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궁금증 해소를 위해 읽고는 봤지만 여전히 하퍼 리가 위대한 작가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

 

<앵무새 죽이기>는 출간 이래 매년 미국에서만 백만부가 팔려나가는 초대형 베스트셀러이다. 세기의 명작도 운대가 맞아야 만들어진다. 공민권 운동이 부상하던 시기와 맞물려 중고등학교 필독서로 지정되면서 작가조차 감당 못할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글쓰기도 명백한 노동의 일종이다. 해서 한 권의 책으로 이렇게 인생역전(?)을 한 작가들을 보면 형평성 측면에서 부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본인이 의도한 것도 아니고 전작을 뛰어넘는 후속작을 내놓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닌데도 왠지 비겁하다는 (삐뚤어진) 시각을 거둘 수 없다. 그러다보니 항상 <앵무새 죽이기>는 물론 하퍼 리 역시 지나치게 과대포장된 거품이라고 여겨왔다. 성인이 된 스카웃이 애티커스를 재발견했던 것처럼 성인이 된 지금 읽는 <앵무새 죽이기>는 또 다른 맛일 것이다. 그래서 하퍼 리를 깔 때 까더라도 원문 재독 후 결정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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