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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저자
한윤형 지음
출판사
어크로스 | 2013-04-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에 소속된 청년 논객 한윤형의 『청춘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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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란 기실 수치에 불과한 사회적 지표지만 동시대에 비슷한 문화적 텍스트를 향유하며 집단적 기억 및 시적 감수성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이는 때로 그 어떤 공통분모보다 강력한 동질 의식을 이끌어낸다. 83년생 저자는 2001년에 대학에 입학했으니 나와 동갑이나 마찬가지다. 군대라든지 흔히 남자들의 '전유물'로 치부되는 게임이나 무협지에 열광했다는 이력만 제외한다면, 저자의 목소리가 곧 나의 목소리다. 피부로는 느끼지만 말로 풀지 못했던 지점을 속 시원히 대변하고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사회구조적 현상까지 조목조목 짚어 주니 '청년 논객'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다. 


30대 초반의 저자가 동년배들에게 보내는 전언은 그간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간주되는 인사들이 꼰대처럼 씨부리던 표피적 진단과는 결이 다르다. 저자의 나이와 이력만으로도 세대 담론을 전개하기에 충분한 위용(?)을 가지며 문제의 핵을 파고드는 예의 그 날카로운 분석력과 명쾌한 필력은 '기꺼워야 할 청춘인데 사는 게 왜 이렇게 팍팍한지'에 대한 사회맥락적 원인을 제시한다. 그리고 청춘이 아파야 하는 현상적 원인에만 천착하는 게 아니라, 총체적 객관화 및 실천적 노력을 촉구한다. 이는 많은 저자들이 으레 안전 노선으로 택하는 공염불적 촉구를 넘어선다. 청년 독자들이 스스로 문제 의식을 깨닫고 실천의 불을 지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논객이 되기 위한 가장 첫째 조건은 독단과 아집이라는 비난에도 주저 말고 과감히 자기 주장을 과감히 펴칠 수 있는 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윤형은 비겁하게 부정적 피드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대신 스스럼없이 자기 패를 내보이며 독자를 매혹한다.

 

<응답하라 1997> 열풍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정확했다. 2000년에서 2001년으로 해가 바뀌던 즈음, 장동건과 유오성 주연의 <친구> 열풍이 전국을 강타했다. 영화의 명대사를 패러디한 유머물이 넘쳐났고 조폭의 뜨거운(?) 의리와 마초적 남성성을 미화하는 풍조도 공공연히 횡행했다. 심지어 신장개업한 고깃집마저 간판을 <친구>라 내거는 것을 보며 그야말로 <친구>가 전국을 접수했음을 실감했다. 


<친구> 열풍을 끌어낸 일등공신은 4,50대 중년 남성들의 향수를 자극했다는 데 있었다. <친구>가 이렇게 폭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던 데 반해, 나를 비롯한 내 주변 사람들 중에 <친구>를 그렇게까지 재미있게 봤다는 관객풀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20대가 여자가 감응하기에 <친구>는 너무도 공감적 괴리가 큰 텍스트였다. 그 시절, 공강 시간에 친구와 함께 거리를 배회하며 리 세대도 언젠가 나이가 들어 <친구>처럼 추억을 소환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만들어지겠지 하며 농담 섞인 대화를 나누던 기억이 선연하다. 문제는 추억을 꺼내는 시점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는 것이다. 


흔히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을 회상한다는 건 나이 들었음의 방증이라고 한다. 지금까지의 일반적 정서라면 30대 초반은 아름다웠던(?) 과거를 추억하기에 아직 이른 때다. 한창 혈기왕성하게 탄력적으로 사회 기반을 닦는 데 재미 올려야 할 청년들이 불과 15년 남짓한 과거 고등학교 시절을 추억한다. 나 역시 이따금씩 내 인생의 최고 전성기(?)는 부모 품에서 호위호식하며 공부만 잘해 좋은 대학에 가면 만사형통이라 믿었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일단 대학만 들어가면 그다음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떻게든 술술 풀릴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대학생의 신분이 모종의 훈장처럼 여겨지며 괜찮은 대학 졸업장 하나로 성공의 탄탄대로가 보장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IMF가 터지면서 사회경제적 거품이 순식간에 빠졌고 이른바 취업 대란이 생겨났다. 기준선에 대한 여러 가지 논박이 있을 수 있겠으나 보통 그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은 세대는 보통 98학번부터인 것으로 계산한다. 나는 취업 대란이 터지고 얼마되지 않은 때 대학을 입학해서 혼란이 조금씩 안정되어가던 무렵 졸업했다. 그즈음 대학은 이미 청춘을 만끽하는 지성의 요람의 기능을 상실해버렸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취업양성소를 자처하는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다. 민주화 운동의 퇴조로 말미암아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냉소가 팽배했고 학부의 출현과 개인의 원자화로 선후배간이나 동기들간의 연대 의식도 거의 희미했다. 80년대처럼 피가 들끓는 격동의 몸짓도, 90년대처럼 풍요와 낭만이 흐르는 여유작작한 청춘도 아닌, 그야말로 뜨뜻미지근한 대학 생활을 보낸 셈이다. 


이 당시에도 대학 졸업장이 더 이상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위기 의식의 발로로 대다수가 토익 점수 높이기와 학점 관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지금처럼 저자의 말마따나 "예전이라면 '여가'에 해당했을 활동조차 '취직'이라는 목적에 합치하게 구조화시켜야 한다는" 극한의 강박이 강요되진 않았다. 분명 나 때에도 취업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적어도 내 동기나 선후배를 비롯한 중고등학교 친구들에게만큼은 딴나라 얘기였다. 취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번번이 고배를 마시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고시의 굴레에 갇힌 극단적 경우가 아니고서야 모두 번듯한 명함을 갖는 데 성공했다. 

 

하여, 몇 년 전 <88만원 세대>란 책이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을 때 적잖이 불편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공공연히 위기 의식과 세대적 갈등을 양산하는 자극적인 제목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주변을 아무리 눈씻고 둘러봐도 취업을 제대로 못했다는 사례는 커녕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로도 100만원이 안되는 돈을 받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었다. 88만원이라는 게 액면가 그대로 88만원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기본적인 생계가 불가능한 열악한 처우를 받게 된 청년들의 현주소를 함의한다고 해도 개인적으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수치였다. 사회경제적 불평등 현상을 과도하게 강조해서 여론을 조장하는 선동 공작으로밖엔 비춰지지 않았다논쟁의 불씨를 당긴 문제작이었던 만큼 금방 사장될 거라는 내 예측과 달리, <88만원 세대>는 세대 담론을 이끌어낸 시대의 교본처럼 자리 잡았다. 이 책에서도 저자가 의견을 개진하는 데 가장 많이 인용한 텍스트가 바로 이 <88만원 세대>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는 90년대 후반 IMF 날벼락을 맞은 취업대란 세대에서 오늘날의 88만원 세대로 전이하는 분기점에 위치한 낀 세대로 스스로를 정체화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양 세대보다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의 질과 사회적 혜택을 조금 더 누렸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세대 규정을 위한 시차 확보 및 통계적으로 두드러지는 공통 지표가 불충분한 이유로 분류학상으로 유령화되었지만, 나는 양 세대에 걸쳐있는 동시에 어떤 한쪽의 맥락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과도기에 속해 있다.

 

지금의 청년들은 분명 부모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더 풍족하게 누리면서, 표면적으로나마 민주화가 성취되어 안정된 사회에서 성장했다. 부모 세대보다 배운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고, 일찍부터 세계에 노출되어 국제화 감각도 탑재했다. 그런데 지금 우린 부모 세대보다 더 암울한 현실과 미래를 마주하게 되는 역설에 봉착했다. 부모 세대처럼 성장 사회의 느슨함에 틈입하여 성취감을 느낄 여지마저 강탈당했다. 자본주의와 민주화가 정착되지 않았던 근대기에는 판을 바꾸는 게 비교적 실현가능한 시나리오였고 실제로도 현실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그러나 어느 시점엔가 판은 고착화되었고 부와 권력은 세습되기 시작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이젠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지 햇수로 7년째다. 직장 생활 5년차에 들어선 지금에도 일반 대기업 초봉에 미칠까 말까 하는 비루한 월급쟁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불성실했던 취업 준비와 업계의 특수성을 고려한대도 십대였던 내가 꿈꾸던 모습과는 점점 거리가 먼 현실이 왕왕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현실 감각이 전무하던 고등학교 시절, 연봉 1억의 성공 미담도 같잖았다. 평균치 이상의 머리를 가졌다고 자부했던 지라 나도 얼마든지 노력하면 연봉 1억이 뭐 대수인가 싶었다. 나의 부모가 별 부침 없이 돈을 벌었던 것처럼 나도 얼마든지 남부럽지 않게 내 입에 풀칠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너무 쉽게 첫 직장을 들어갔고, 적성에 맞지 않아 3개월 만에 때려친 뒤 다신 회사 따위 다니지 않겠다며 '자발적 잉여' 선언을 했더랬다그러다 잉여의 무력감과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고 제발로 조직에 기어들어가는 선택을 했다. 다시 취직하겠다고 결심한지 고작 2주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취업 시장이란 내가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투입 가능한 무풍 지대였고, 어디 가서 굶어 죽을 고민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 장담했다. 그러나 다른 업계로의 이직을 준비하는 요즘, 번번이 서류에서 낙방하고 나이 제한에 걸려 서류 접수조차 봉쇄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불현듯 잉여로 전락한 내 처지를 비관하는 자괴감이 엄습했다. 이제서야 사회 생활 감이 좀 생겼고 열의도 가득 차 있는데 나의 인력 가치는 전에 없이 하락했다. 타이밍을 놓친 늦깎이 취업 준비생이 설 자리는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내가 경험하는 잉여로서의 삶은 사회구조적으로 저주 받은 88만원 세대들이 겪는 고충과는 조금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내 경우, 판판이 허송하다 너무 늦게 진로를 확정지었다는 시기적 불리함, 여성이라는 성별 조건, 나이 등의 요소들이 이직을 가로막는 일차적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파이가 줄어듦에 따라 일자리도 덩달아 동결해버린 노동 시장, 돈을 벌 여지가 곳곳에 산재했던 고도 경제성장기를 지난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고착화된 선진 사회 문턱을 들어서는 현실과도 종국에는 맞닿아 있다. 

 

한윤형을 검색하니 그의 저작 중 몇몇은 내가 이미 어디에선가 접했던 것들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대상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를 알고 있었음에도 알지 못했던 이로서 이 책을 통해 한윤형을 처음, 그리고 제대로 알게 되었다. 한윤형이 청년 논객으로 지명도를 쌓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궤적을 주목해 온 이라면 이번 작이 다소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수도 있다. 더욱이 기존 기고문들을 고쳐 다시 엮은 책이다 보니 새로운 통찰을 엿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을 계기로 정식으로 한윤형을 접하게 된 나 같은 독자들에겐 그의 전언이 단비와도 같았다.


가 읽은 한윤형은 또래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예민한 정치적 감수성과 사회적 통찰력이 번뜩이는 '깨시민'이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진중권과 강준만을 사숙하며 정치적 문해력을 키웠고 19세의 나이에 당원으로 활동하며 실천적 시민의 전범이 되었다. 반면, 나는 정치적 무관심이 쿨하고 시크하다고 믿으며 20대를 보냈다. 정치란 내 사전에서 가장 쓸모없으면서 내 일상과 너무나도 요원한 단어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란 없다. 좁게는 직장에서 내 입지를 다지는 데에도 정치적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내 세대를 대변하는 목소리임과 동시에 나와는 다른(어쩌면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했던) 진영에서 쉼 없이 진지를 구축해온 아주 다른 종자이기도 하다. 30대에 들어서야 그가 20대부터 천착해 온 문제들에 눈을 뜨게 되니 그간 나의 무지함이 몹시도 부끄러운 동시에 치기어린 질투심마저 난다.


특히나 정치시사에 유난히도 과문한 나로선 어크로스의 이번 책이 아니었다면 한윤형은 여전히 '눈에는 보이지만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자유기고가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크로스는 나에게 한윤형을 알게 해 준 고마운 다리였다. 어크로스라면 인문교양이라는 범주에 충실하면서도 대중에게 너무 난해하지도, 너무 쉽지도 않은 눈높이에서 생명력 있는 양서만을 펴내는 '실한 출판사'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래서 어크로스에서 신간이 나왔다 하면 일단 사고 본다(비교적 신생 출판사라 출간작을 전부 모으는 데 큰 노력과 자금이 들지 않는다는 것도 꽤나 메리트가 있다). 각 권마다 양질의 콘텐츠와 개성 있는 디자인이 버무려져 지성을 깨이고 오감을 간질이는 즐거움을 준다. 

 

거두절미하고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저 관상용으로도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다. 대체 이 세련미 넘치는 디자인은 누구의 작품인가 싶어 뒤를 펼쳤더니 역시나 유명 북디자이너 오필민의 작품이다. 표지를 가득 메운 시원한 흰색 바탕의 하늘빛과 내지의 연보라색 변주가 어우러져 세련된 젊은 감각이 묻어난다어릴 적 즐겨먹던 하늘색 캔디바와 보라색 밀카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색깔 조합이 특히나 마음에 든다. 표지 전면을 장식한 얼굴 없는 청년의 실루엣은 시각적 시원함을 더해준다. 아울러 사면초가의 청춘기가 어느 특정 청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모든 청춘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구구절절 다 내 이야기였기에 한 장, 한 장 가슴으로 읽었고 최근 일독한 그 어떤 책보다 깊이 공명했다. 너무도 멋드러진 질타에 통쾌했고, 무력감을 넘어 변화를 일구기 위한 출발은 나에서부터 시작하다는 데 통감했다. 무엇보다 저자의 궁극적 당부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점은 머리로 느끼고 행동으로 옮기는 응분의 실천력이다. 기성 세대의 위로를 안주 삼아 피해자 신분에 취해 넋 놓고 방관할 때는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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