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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맛 책수다>의 리플리 편을 듣고 불타는 호기심에 휩싸여 당장 챙겨본 <리플리>. 원제는 <재능 많은 리플리>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90년대 말 한창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맷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팰트로가 열연했다. 주연 배우들의 지명도만으로 개봉 당시 꽤나 화제를 모았고, 1960년도 <태양은 가득히>의 리메이크작이라 더더욱 관심을 끌었다. 기억으론 동네 대부분의 비디오 가게에서 상당히 많은 개수의 보유량을 확보하여 인기작 반열을 과시했던 흥행작 가운데 하나였다.
비디오 가게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희한하게 이 영화만큼은 썩 보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디카프리오 아류 같은 맷 데이먼과 당최 뭐가 멋있는지 알 수 없는 주드 로라...작품성이고 감독이고 간에 철저히 배우 위주로 영화를 선택하는 비디오 오덕으로선 영 매력적이지 않은 조합이었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한창 때 배우들의 모습이 너무 젊고 싱그러워 생경함이 느껴진다.
맷 데이먼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간의 간극에 매몰되어 자아가 분열된 리플리 역을 소름 끼칠 정도로 잘 묘사했고, 주드 로는 방종하는 특권층 자제 디키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왠지 모를 귀티와 귀족 분위기를 풍기는 기네스 팰트로 역시 부잣집 아들의 트로피 여자친구로 적격이다. 안소니 밍겔라 감독은 원래 리플리 역으로 탐 크루즈를 점지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현란한 액션 무예의 화신, 탐 크루즈가 섬세한 심리 묘사가 요구되는 리플리 역을 제대로 소화해냈을지 의문이다. 더욱이 찌질하고 집착적인 샌님 리플리를 맡기에는 기에 지나치게(?) 잘생겼다.
디키(주드 로)는 2차 세계 대전 후 활력을 되찾아 경제적 번영기를 구가하며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가던 50년대의 얄팍한 역동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즉흥성과 냄비적 열정은 그가 탐닉하던 재즈의 속성과 일치한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남부 유럽의 그림같은 풍광을 수려한 영상미와 편집술로 압도하는 영화 초반부와 달리, 후반으로 갈수록 과도한 우연성 개입과 황급한 마무리로 수작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아쉬운 미진함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재능 많은 리플리>라고 붙여진 영화의 원제다. 권선성징악의 관습적 플롯에서라면 연쇄 살인을 저지른 리플리는 당연히 심판 받아야 할 악의 화신이다. 그러나 리플리는 순간의 기지와 탁월한 연기력으로 위기를 모면하며 법의 망을 피해간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탄로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닥칠 때마다 동물적 생존 본능으로 상대를 거침없이 제거하는 발군의 능력을 통해 자신이 꿈꾸는 허상의 세계를 실재로 창조해낸다. 우리는 카르마, 권선징악 등 윤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이상적 세계가 곧 현실이라고 학습 받고 이것에 의지하여 균형과 질서를 구축한다. 그러나 실제 현실 속에서 권선징악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리플리는 이렇게 윤리적으로 불완전한 세계와 이상의 균열을 표상한다.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리플리처럼 억세게 재능 많고 운 좋은 사이코패쓰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실 공포는 배가된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요즘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허술한 플롯이지만, 리플리라는 기형적 캐릭터만 두고 보자면 인간에 내재된 어두운 욕망과 잔인성을 기민하게 포착한 사이코패쓰 드라마다. 이상적 자아를 향한 지나친 열망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그 과정에서 본연의 정체성을 기꺼이 소멸시키며 악을 합리화하는 잔인성까지, 기형적 욕망이 초래한 운명의 비극성이 리플리란 인물로서 재현된다. 리플리의 복잡다단한 심리가 핵심인만큼 영화보다는 소설로 봐야 좀더 미묘한 부분까지 온전히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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