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활자 중독 코스프레

못난 욕망이 들끊는 탐욕지대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5. 9. 26. 22:18

 


잠실동 사람들

저자
정아은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15-02-0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 정아은의 신작 "모든 것은 일상적...
가격비교

 

한겨레 출판사의 지향점에 근사한 '한겨레스러운' 소설. 한겨레는 주로 이렇게 현 세태를 용해시켜 서민 생활의 양태를 지극히 구체적인 수준까지 파고들어간 작품을 선호한다.

 

잠실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천양지차와 대동소이가 모순으로 중첩된 '잠실동 사람들'의 이야기가 확장된다. 없는 부모를 만난 죄로 몸을 팔아 대출금을 갚는 여대생, 여대생에게 값싼 화대를 주며 성욕을 해소하는 40대 가장, 운좋게 강남까지 입성했지만 여느 강남 엄마처럼 살지 못해 가랑이를 찢으려는 그의 아내, 그녀가 전범으로 삼는 자녀 교육에 모든 걸 바쳐 투신하며 이를 자기 과시의 도구로 여기는 극성모들, 그녀들의 남편, 과외 교사, 담임, 학습지 교사, 원어민 강사, 도우미 아줌마 등으로 시점이 옮겨가며 연쇄 그물망처럼 퍼져나간다. 시점 변화에 따라 퍼즐이 맞춰지고 미시적 서사는 차츰 거시적 구도로 완결된다.

 

갈가리 파편화되어 있는 군상들은 한다리 건너면 연결된 시대와 공간의 공동체다. 같은 잠실 안에서도 아파트 재개발로 신건축된 고층 아파트 지대과 미개발촌으로 나누어져 학벌, 연봉, 평수 등의 속물 잣대로 개인의 인생이 등급화된다. 서로를 등급화하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도 기꺼이 등급의 시험대에 올라 결핍된 부분을 기어코 만들어낸다. 자신의 결핍을 확대시켜 상대에게 투사하며 자발적으로 자기 비하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컴플렉스로 곪아터진 내면은 타인의 겉모습만으로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라 오해하고 시기하게 만든다. 돈이 없으면 돈 있는 자를 갈구하고, 돈 있는 자는 남에게 내세울 만한 명예에 집착한다. 못난 욕망이 들끓고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모든 게 허허롭다. 소설 속 등장 인물 모두가 잠실이라는 거대 병동에 입원 중인 중증 환자들이다.

 

그렇다면 왜 잠실이 배경이어야 했는가. 잠실은 강남권이면서도 정통 강남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적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중산층의 보금자리였던 곳이 재개발 사업과 맞물려 고층 아파트 단지촌으로 변모하면서 중산층의 욕망과 계층 상승욕구가 뒤엉킨 문제적 공간이 되었다. 잘빠진 재건축 아파트에 입성한 중산층들은 부를 과시하고 스스로를 구분지으려 하면서도 강남 주류권에 편입되지 못했다는 패배의식과 열등감에 절어 있다.

 

소설에서 특히 비판적 시각으로 집중 조명하는 세태는 방향키를 잃고 돈과 탐욕에 표류하는 광란의 교육열이다. 교육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을 양성하기 위함이지 남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학벌과 재력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영어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해서 고급 학원, 특목중, 특목고, 일류대에 보내기 위해서라면 장기도 팔아먹을 각오가 되어 있는 부모들의 삐뚤어진 교육열은 한심하지만, 그들을 보고 배우며 성장할 아이들은 두렵다.

 

사교육 업계 여기저기를 기웃대며 실제 내부 실정이 어떤지 대충 알고 있는 입장에서 사교육에 목매는 터무니없이 골빈 엄마들과 이들의 등골을 빼먹는 사교육기업들의 작태에 구토가 난다. 지금 사회가 그렇다느니, 남들 다하는데 별 수 있겠냐는 변명은 비겁하다. 자기 중심도 없는 우매함과 물질로 도배된 천박한 사고. 그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남한테 피해나 주지 않는 인간으로 크면 그거야말로 천만다행이다. 나라고 이런 속물적 가치를 좆는 인간들과 무엇이 다르겠냐만은, 내면이 채워지지 않는 물질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하는 자기반성적 기제가 아직까지 제기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해야 하는 건가 싶다.

 

극사실주의적인 소설은 대체로 너무 까슬해서 읽기 불편하다. 비유, 은유, 상징 등 문학적 장치들이 적당히 완충 작용을 해서 감상과 상상의 자유가 허락된 편이 좋다. 오랜만에 국내 소설 한번 읽어볼까 해서 집어든 작품이라 내 취향이네 아니네 부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소설의 지배적인 인상에 대해 논하자면, '소설 쓰고 자빠졌네,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라고 반응하게 되는 선정적 제목의 신파성 기사를 접했을 때의 정취와 비슷했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르포에 더 가깝다. 소설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버젓이 발생하고 현실 속 일들이 소설로 박제되어 남겨지기도 하니 소설과 현실의 경계는 환상일지 모른다.

 

리센츠, 엘스, 트리지움, 튼튼영어, 프뢰벨 등의 실제 거주지 및 교육 브랜드가 말장난 식으로 교묘하게 비튼 허구들과 적절히 섞여 소설과 현실 사이를 줄다리기한다. 가장 경탄했던 싶은 지점은 실제 대화를 듣는 듯한 자연스러운 입말체 대화와 주변에서 흔히 볼법한 인물들의 입체성. 현실 세태를 과장이나 축소없이 그대로 활자로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꼴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한겨레가 과연 후한 점수를 줄 만 했겠다.

 

 

'활자 중독 코스프레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셀은 당분간 사절  (0) 2015.10.09
전복과 반전의 이음새로 엮은 강헌의 음악사  (0) 2015.09.28
가없는 인생의 무게  (0) 2015.08.16
색소폰 자양강장  (0) 2015.08.09
서울 작파 교본  (0) 2015.07.20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