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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외경심의 발로로 선생님이란 호칭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는 분을 마주할 때가 있다. 

영복 선생님이 그러하다. 



글은 글쓴이의 인간적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세기의 고전이라 일컫는 대문호의 글에서도 빼어난 기교만을 읽었을 뿐 글쓴이의 내음까지 맡아본 적은 없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에선 방금 벼루에서 곱게 갈은 듯한 먹꽃 향기가 난다. 행간마다 녹져 있는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사상적 깊이를 헤아리려 분투하는 가운데, 통렬한 자기 성찰의 지점과 만난다. 주위를 돌보지 않고 그저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겠다고 버둥대던 어리석은 이기심을 반성하게 된다. 메말랐던 가슴에 불씨가 피어오르고 서서히 영혼이 지펴지는 훗훗한 기운이 타고내린다. 일상에서 분노와 화를 다스리지 못해 영혼이 멍들어가는 듯한 극한의 순간에서 이따금씩 선생님의 글을 꺼내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활자가 아닌 육성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달뜬 마음에 퇴근길의 피로와 무거움도 이겨낼 수 있었다. 이날 강연은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모든 생물은 공부를 하며 살아간다. 미물도 공부란 정신과 육체가 생동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공부는 평생에 걸쳐 부단히 해야 하는 인생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선생께서 고백하시길, 욱중 동료들과 주고받았던  만고풍상의 이야기들은 20년 옥중고를 무던히 견뎌내고 오히려 세상을 더 넓게 품는 가슴을 가질 수 있었던 힘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풀어놓는 지난한 삶의 궤적들에 귀기울이며 그들이 겪었을 아픔에 절절히 공감했다.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공감대가 형성되는 가운데, 타자화의 장벽은 허물어지고 인간의 불완전함을 껴안는 가슴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을 사로잡고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힘의 근원이 스토리텔링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부분이다.)



목적을 위해 인간을 수탈하고 폭력을 서슴치 않아 호모 사케르가 만연한 세상이다. 훼손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서로가 스스로뿐 아니라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조금씩 양보하는 세상을 위해선, '인간'을 '인간'으로 이해하는 '인간'다운 가슴을 품어야 한다. 선생께서 늘 강조하시는 덕목 중 하나는 더불어 사는 삶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숲을 이루듯, 한 개인은 다른 누군가의 관계망 속에서 끊임없는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세계를 만들어간다. 세계란 무릇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나와 다른 이와의 관계 속에서 설정되는 유동적 관념이다. 진정한 공부란 세상과의 만남, 나와 닿는 사람들과의 접점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부는 흐르는 강물을 닮았다. 강물은 흘러가는 여정 속에서 접촉하게 되는 모든 것과 대화한다. 강물은 종래에 바다를 만나 바다의 원대함을 기껍게 받아들이다.  나의 편협하디 편협한 시선으론 도저히 통찰할 수 없는 세상의 광활함을 일깨우며 늘 낮게 살아가야 한다는 겸손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타인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발로 뛰고 행동해서 실천하는 공감만이 생명력을 갖고 세상을 바꾼다. 







때론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그림이 더 큰 울림을 자아낸다. 선생께서 직접 그린 그림들로 슬라이드가 채워지며 물 흐르듯 전언하셨다. 말씀도, 그림도, 신영복 선생님이 아니고선 그 어떤 누구도 감히 모사할 수 없는 불가침한 예술적 경지이자 고유한 영역이다. 이런 분과 동시대를 살며 현재 내 위치를 올바르게 재조정할 수 있는 역할 모델을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복한 일이다.



선생님의 강연 후, 성공회대 교수들로 구성된 중창단, 더숲트리오의 공연이 이어졌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이 있을 때마다 별책부록처럼 따라다니며 노래한다는 아마추어 가수라고 스스로를 낮춰 소개했지만, 웬만한 프로 가수들 못지 않은 수준급 노래 실력을 보여 주었다. 노래도 노래지만, 어쩌면 이렇게 다들 말씀도 재미지게 잘하시는지 맛깔진 말솜씨와 유머 감각에 홀딱 반해버렸다. 



2시간에 걸친 행사가 모두 파했을 땐, 이미 날은 어둑하고 밤공기는 깔깔했다. 그간 묵혔던 심리적 체증이 내려가고 어지러웠던 머릿속도 차츰 개인다. 이런 게 진정한 힐링이지,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세상을 먼저 산 내가 너에게 충고와 위로를 해주겠다는 식의 어쭙잖은 책에 기댈 게 아니다. 인생의 빛이 되는 분의 음성을 따라 자기 객관화를 실천하는 그 과정 안에 힐링이 있고 스탠딩이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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