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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을 위해 만인이 존재하며 공유•주체성•안정을 위해 개인이 무참히 말살되는 세상.
대중이 공산품처럼 규격화되어 보편성만이 최고 가치로 여겨지는 ‘무늬만’ 조화로운 세상.
오직 쾌락만이 존재할 뿐 고통과 질병은 철저히 배격되는 세상.
과학기술이 인간의 통제 도구로 복무하는 세상.
헉슬리는 과학기술이 괴물로 둔갑한 가상 현실을 '멋진 신세계'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과연 헉슬리가 풍자한 세상이 지금보다 더 암울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현재가, 혹은 다가올 미래가 더 디스토피아에 가깝지 않을까?
헉슬리는 개인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절대 가치로 상정한다. 불행할 권리도 자유의 둘레로 포섭시키고, 더 이상 존엄을 지킬 수 없을 때 스스로 생을 놓을 수 있는 ‘자유’마저 옹호한다. 그런데 헉슬리가 의도한 순전한 자유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에서도 과연 이 소설이 유효한 것인가?
지금 우리는 자유 과잉 시대를 살고 있다. 과거 신분제 사회처럼 노골적으로 계급을 구획하진 않는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삶을 살 수 있다는 (은혜로운) 믿음을 주입 받지만 불행히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금수저, 흙수저 등 계급 장벽을 ‘우프게’ 반영하는 일련의 신조어들만 보아도 그렇다. 여전히 계급은 비가시적인 형태로 인간을 편가르고 이간질한다. 자유가 주어진들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폭이 구조적으로 원천 제한되어 있다면, 자유의 대가로 모든 책임을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면, 소수의 권력층에 피지배 다수를 수탈하는 구조가 병리적으로 고착되어 있다면, 차라리 조건반사화된 무지 상태가 낫지 않을까?
제 아무리 쌔빠지게 노력한들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진입 장벽 앞에 무기력하게 좌절하는 편보다야, 최하층 계급 엡실론으로 태어났어도 엡실론이 아닌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내재화된 운명에 순응하고 안분지족하는 편이 도리어 낫지 않겠냐는 말이다. 더군다나 과학기술이 미증유의 고도 성장 가도를 질주하는 현 시점에서 부의 불평등은 심화될 전망이므로 존엄이 태생적으로 거세된 삶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발칙한 역발상이 떠올랐다.
<멋진 신세계>는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SF소설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고전으로 회자된다. 그런데 과연 이 소설이 여전히 ‘지금 여기’로 호출될 시의성을 가지고 있는지 찰찰히 따져볼 때가 아닌가 싶다.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바래지 않은 헉슬리의 혁혁한 통찰력만큼은 인정! 그러나 애당초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고찰은 부재하다. 우리가 사는 2017년이 ‘멋진 신세계인’지, 아니면 헉슬리가 핍진하게 그려낸 2540년이 ‘멋진 신세계’인지, 빨간약/파란약만큼이나 헷갈리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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