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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미래
국내도서
저자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매트 리들리(Matt Ridley) / 전병근역
출판 : 모던아카이브(모던타임스) 201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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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크 디베이트(Munk Debates): 연 2회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 
세계 정상급 지식인이 2인 1조로 짝을 맞춰 국제 현안을 논하는 토론. 
https://www.munkdebates.com/ 

2015년 11월, 하반기 멍크 디베이트의 서막이 올랐다. 
4인의 발군 논객이 한 자리에 모여 
‘인류의 미래’를 화두로 첨예한 지성 배틀이 치러졌다. 
인류의 진보를 낙관하는 스티븐 핑커와 매트 리들리. 
그에 맞서 회의론적 미래관을 주창하는 알랭 드 보통과 말콤 글래드웰. 
당대 내로라는 지성 간에 날 선 공박이 오갔다. 
토론 전 찬성 71%, 반대 29%이던 청중 여론이 
토론 후, 찬성 73%, 반대 27%로 요지부동함으로써 
핑커와 리들리 팀이 승리했다. 

과학자로 대표되는 핑커와 리들리 대 인문학 주자로 나선 보통과 글래드웰. 
양 팀의 의견 공방은 결국 학문적인 관점 차이라는 근원적인 ‘이질성’을 배태한다. 
출발선부터가 다르므로 평행선 상의 이견 차이를 좁히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욱 팽팽한 드라이브와 스윙으로 토론장을 가득 메우는 용호상박. 
열띠었던 토론의 엑기스만을 추려 <사피엔스의 미래>라는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

주지하다시피 인류를 둘러싼 철학적인 논제가 깊숙이 맞물려 있는 빅퀘스천이다 보니 가타부타 무 자르듯이 간명하게 답할 사안은 아니다. 4인의 저명한 지성조차 논리의 거점이 흔들리는 약점을 노출한다. 선형적 역사관에 반대해온 한 사람으로서 인류의 미래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 양상이 달라질 뿐, 결코 개선되지는 않을 거라는 입장은 여전히 확고하다. 시종일관 보통과 글래드웰의 편에 서 있었고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상대편의 관점에서 거꾸로 생각해보려 부단히 애를 써 보았으나 핑커와 리들리의 논박은 끝끝내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과거=현재=미래 

과학기술의 발전이 추동하는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진보와는 별개로 인류가 진보한다는 믿음은 허상이다. 찬성론자들은 진보가 신앙이 아니라 통계 수치 및 누적 데이터 등이 가시적인 근거로 대변되는 불가역성의 진일보라고 주장한다. 일견, 숫자는 물질적 번영과 개선을 증명하며 세계가 점진적으로 진일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다. 백 번 양보해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끊임없는 성찰로 나아지는 측면이 있으리라는 데까지는 부득불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글래드웰이 반복해서 강조하듯 표면적인 혁신이 이루어지더라도 또 다른 위험 부담이 불거지는 현실에 또다시 봉착한다. 무엇보다 인간은 계량화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현실이 나아지더라도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허기를 느낀다.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 체감하는 인생 지수는 대략 동일한 것이다. 

#고통 보존의 법칙 

일례로 국제적으로 전쟁 감소 빈곤과 질병 퇴치 등 문제는 과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퇴치되었지만 이상 기후, 테러 등의 신종 문제가 대두되었다. 좀 더 미시적인 차원으로 내려가 소셜 미디어로 달라진 일상 지형도를 떠올려보자.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언제든지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편익 도모에 기여했지만 그로 인한 정신적인 피로도 증가와 각종 범죄 채널로 악용되는 미증유의 문제가 발생했다. 더욱이 소통의 양적 증대가 질적 향상을 담보하진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외롭고 고독하며 소외감을 토로한다. 이것을 과연 진보라고 볼 수 있는가? 편리해진만큼 감수해야 할 새로운 기회비용이 추가되었다. 결국 제로썸 형태로 현상 유지가 될 뿐이다. 개편을 개선이라고 여기는 착시부터 교정해야 한다. 


#진보라는 이름의 소마 

흔히 인간의 삶은 견뎌내는 것, 살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끊임없는 고통의 굴레를 헤치고 견뎌내기 위해선 저마다 인생의 의미를 탐색하고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응당 이유 있는 ‘자기 최면’을 건다. 보통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결함 있는 호두’를 가진 지극히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이 택하지 아니할 수 없는 필연적인 생존방도다. 보통과 글래드웰의 논리 개진이 구구절절 옳다 한들 이왕이면 핑커와 리들리의 낙관적인 태도로 인생에 임하는 편이 더 ‘행복하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나의 사견과 무관하게 과반수가 넘는 찬성표가 확고부동한 입장을 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마저도 진보론적인 미래관에 반대하면서도 한 켠으론 찬성론자의 심정을 공감하는, 그래서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이율배반적인 입장을 취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난상 핑퐁, 그러나 유의미한 

토론 참가자 4인 모두 각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박식가들이다. 명석한 권위자들이 모였으니 토론의 질도 무릇 훌륭해야 할진대 핑퐁은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실상 토론의 질은 단순히 참가자 개인의 총합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주제 선정, 참가자 구도, 사회자 역량 등 각 요소들이 상호 교섭하는 곱셈의 방식으로 도출된다. 헌데 본 토론은 이러한 정석을 무심히 배반한다. 과학기술의 힘을 신봉하는 과학자 팀과 형이상학적인 인간 사회심리에 천착하는 인문학자 팀 간의 자못 우스꽝스러운 대결. 양팀 모두 공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서브를 넣는다. 비록 어느 순간 공이 증발해버린 난삽한 한판승부지만, ‘진보’에서 점화된 4인의 견해를 종합하면 기술의 본질 및 인간의 삶에서 기술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기술로 변화하는 세상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등 미래 맞이에 필수불가결한 방향 감각을 활성화시킨다. 

#제 점수는요 

개인별 평가를 매긴다면 핑커에게 최하점을, 보통에게 최고점을 주겠다. 핑커라 하면 인지과학 영역의 권위자로서 외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일상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보통의 경우 지나친 언론 노출과 소통이 되려 빈 수레가 요란한 ‘스타 인문학자’라고 경시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토론에 임하는 두 사람의 태도를 가만 보니 핑커는 예상 외로 지나치게 나이브하고, 보통은 기대 이상으로 명석하고 치밀하다. 과연 대중의 눈높이에서 쉬운 언어로 철학을 설파하는 학자답다. 그가 다혈질 면모에 놀랐다는 옮긴이의 평은 도리어 나를 뜨악하게 했다. 이런 쟁점의 주제를 두고 어찌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겠으며 ‘결함 있는 호두’의 소유자임을 보란 듯이 현현하고 있으니 이 어찌 언행일치의 모범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핑커와 보통이 주는 울림의 간극이란 결국 과학과 철학의 개념적인 문제로 치환되며, 과학은 결국 철학에 종속되는 하위 개념에 불과하지 않냐는 ‘비관적인 현실주의’의 개인적 신념으로 귀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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