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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맛 다이어리

일상을 '트레바리'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7. 2. 1. 16:04



스스로 '모임중독자'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첫째 그럴 체력이 안되고 은근 숫기가 없는데다가 소모적인 인맥 확장을 극혐한다. 

그런데도 꾸준히 모임에 적을 두게 되는 것은, 

(계속 작은 곳으로 이직을 하다보니) 직장에서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갈급함이 있어서다.

20대를 허송하고 자칭 '10년을 늦게 사는 이'로서 

도태의 위기, 학문적 호기심, 생계/노후 불안, 지적 허영(?)이 한데 얽힌 모종의 발악이랄까.

30대에 접어들면서 독서 모임에 입문했고

선천적 뒷심 부족 증후군도 극복하고 어차저차 하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끈을 놓치는 않고 있었지만 근거지를 옮긴 이래 물리적 거리를 이기지 못하고 무기한 보류.


이제 마포구, 서대문구는 엄두조차 안나는데 

그나마 가깝다는 강남권은 상대적으로 취약하기 그지없는 독서 인프라. 

(북티크, 최인아 책방, 책과얽힘 등이 생겨나며 점진적인 발전의 싹이 보이긴 한다만 we'll see)

그러다 작년 여름인가, 지인을 통해 주워들은 트레바리.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매월 1회 총 4번을 한 텀으로 진행.

18세기 프랑스 살롱을 방불케하는 엘리트 성역 바이브.

이제껏 보던 독서 모임과는 때깔이 다르다.

'읽고, 쓰고, 대화하고, 친해지는 커뮤니티 서비스'라는 강령 아래 영리 목적의 스타트업이므로 

단순한 여가 활동이나 자기 계발 도모를 위한 방목형 모임과는 

태생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압구정 베이스라니 물리적/심리적 거리감이 덜하고

커피 한 잔에 만원을 호가하는 요즘, 독서 지평을 넓히는 데 

1회 5-7.5만원 정도면 지출이라기보다 값어치 있는 투자이지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추구하는 지향점에 부합하는 듯 보여 마음이 동했다.

(마땅한 대안이 없기도 했지만)


마침 한겨레교육문화센터 분당점에 개설 예정이던 번역 강좌와 트레바리를 고민하던 중 

(요일이 겹치지도 않는데 체력적 열세로 병행은 못한다며 무조건 택일 노선)

한겨레 분당점이 경영난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희망 강좌도 자동 폐강.

그새 트레바리는 진즉에 시즌 마감이 되었고 무망하게 두 마리 토끼를 놓쳐버렸다.


유야무야 트레바리는 기억 속에서 빠염.

그런데 지난 연말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트레바리에 신청했다는 얘길 듣고 

잊혀졌던 트레바리가 다시금 관심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개인적으로 계획하던 일이 홀딩되면서 안그래도 구멍을 메울 활력이 필요했는데

중단했던 독서모임질이나 다시 불을 지피기로 작정.

한 달에 한 번인데 북클럽 한 개만을 신청하자니 뭔가 모자라고 

그렇다고 놀고 휴식할 시간도 부족한 마당에 

관심 가는 거 다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깔끔하게 2개로 절충했다.


대관절 2개를 어떻게 추려야 하나 정말 많은 시간을 들여 갈등의 갈등을 거듭했다.

1차 필터링 기준은 암만 해도 요일. 뒷풀이를 해도 부담없는 목금이어야 하겠다.

세부 선정 원칙은 최대한 내가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분야여야 한다고 제정.

중문과를 나왔지만 차마 중문 전공했다고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어,

안면몰수 영문과인척 사는 중알못이므로 중국 당첨!

그리고 이과 영역이 선천적으로 미발달된 디지털 바보이므로

기술 관련한 북클럽도 추가 확정! 

중국과 기술: 비단 교양 증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추후 커리어 확장에도 유용할 주제들이니 

포기해야 했던 클럽들이 아쉽지 않을 선택이었다며 셀프 칭찬.


그렇게 정유년 새해가 밝았고 신청 북클럽 각각 1회 출석을 마쳤다. 

역시 세상은 넓고 잘라딘 잘난 사람은 무궁하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나의 모자람을 상기시켜주는 고퀄들에 기가 죽는다.

나는 저 나이 때 저렇게 똘똘하고 야망에 불타오르지 않았는데 하며

늙다리 꼰대 같은 자조의 탄식이 절로 튀어나온다.

그런데 우주 조빱 같이 느껴지는 남루함이 그다지 고역이진 않은,

심지어 이를 은근히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변태스럽고도 복잡미묘한 심정!

젊은이(?)들에게 슬슬 밀려나고 있지만 아직 인생 포기하기에는 이른, 

지금이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살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중대 기로에서 

현실은 쭈그리일지라도, 앞으로는 절대 쭈그리로 살지 말자는 경종을 울리는

권토중래의 채찍이 되어 주고 있다.

(고작 2번 나가놓고 설레발)


대표가 젊어서 그런지 남다른 스타트업 스피릿을 구가한다.

트렌드를 주도하는 동물적 감각만 있는 게 아니라 사업 운영 방식도 똑부러진다.

진시황 도량형 통일하듯 수십개 북클럽을 

표준화된 방침으로 다스리는 중앙집권의 저력도 보여준다.

동네 친목 모임이 아니라 사업장이기 때문에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 

조직 관리의 가장 기본인 원칙과 절차가 지켜지지 않아 종래에 폭망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던가.

사업할 기본 자세가 된 젊은피라며 엄지 척.


돈을 내고 책을 읽는다, 책만 읽는 게 아니라 독후감도 써야 하며, 

독후감을 기한 내 지정 양식대로 제출하지 못하면 해당번 모임 참석권을 박탈당한다.

지불이 권리가 아닌 의무로 지워지는,

이 얼마나 되바라지고 발칙하며 단호한 요구인가. 

그런데 이게 먹힌다!!!

이쯤되면 니즈를 원츠로 발흥시킨 창발 경제라 하겠다.

암만 해도 그냥 읽기만 한 책보다는 뭐라도 끄적여본 책이 두고두고 값지다.

시즌 동안 전 클럽 다른 멤버들의 독후감도 읽어볼 수 있도록 하여 공유의 가치를 실천하며 

이 또한 '세상을 더 지적으로, 사람들을 더 친하게'라는 구호와 상통한다.


다만, 페북과의 지나치게 긴밀한 연동은 페북 비사용자로서 불편하다.

그저 대세를 따르지 않는/못한 내가 치러야 하는 비용인 걸로.

예단하기 이르지만 현재로선 북클럽 2개 병행까지가 내 한계치라고 판단. 

책 읽어야 해, 독후감 써야 해, 벙개도 가야 해, 모임도 가야 해,

기본 생활 패턴에 이 정도 변칙을 끼워넣는 것도 예사일이 아니다.

허나 이렇게 일상에 활력이 되는 변칙이라면 사소한 기회비용 따윈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다.


여하간 북클럽의 패러다임을 비틀은 

스타트업계의 우수 사례로 화제몰이 하는 데까지는 성공.

앞으로 어떤 진회 방식으로 생명 연장을 해나갈 것인가가 관건이다.

뭐 여기야 내가 걱정 안해도 제살길 잘 찾아갈 것으로 보이고, 

시작이 반이라지만 나부터나 꾸준히 이어나갈지 먼저 챙기는 걸로.

자아도취와 자기비하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속에서

평형 감각을 고무시키는 동원임은 자명하니

일상에 자극도 받고 '남의 말에 반대하기 좋아하는' 특질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여력되는 때까지 계속하겠다고 작심일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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