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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buff 빙의

패터슨의 패터슨의 패터슨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8. 2. 15. 11:41



미국 독립 영화계의 총아, 짐 자무쉬가 낳은 2016년작. 짐 자무쉬라는 브랜드에 걸맞은 '짐 자무쉬스운' 시적 허용을 스크린에 적었다. 늘 색다른 자기만의 스타일로 팬덤과 명성을 구축해온 짐 자무쉬가 이번에는 시라는 문학 장르를 영화적으로 해석한다. '미국 뉴저지 패터슨에서 시를 쓰는 버스운전사 패터슨'이 이끌어가는 한 편의 서사시. 


<패터슨>은 덤덤하고 나른한 평상의 리듬으로 주인공 패터슨의 한 주 일상 풍경을 반복되는 패턴으로 관찰한다.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운전사.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반려견 마틴과 함께 사는 지극히 평범한 저소득층 노동자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정해진 노선의 버스를 몬다. 근무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마틴을 산책시키고 단골 바에 들러 맥주를 걸친 한담을 즐기다 하루를 마감하는 매일을 살고 있다. 


되풀이되는 일상에도 조금씩 잔무늬는 달라진다. 특별한 직업이 없는 로라의 미덥지 못한 변덕스런 자아 실현 찾기, 패터슨의 버스에 올라타는 승객, 그의 단골 바에 찾아오는 손님 등 인간군상의 질박한 역동이 단조로운 하루를 장식한다. 쳇 바퀴처럼 굴러가는 패터슨 이하 우리 모두의 일상은 로라가 즐겨 입는 (대단히 키치스러운) 의상 디자인처럼 반복과 변주를 오고간다.  


하등의 특별할 게 없는 범인(人)에게도 유독 남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패터슨은 시를 쓴다. 일상 속 사람과 사물을 소재 삼아 자신의 비밀 노트에 시를 끄적이는 유별난 취미를 가졌다. 로라는 패터슨에게 시인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므로 그가 차곡차곡 쌓아둔 습작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자고 독려에 찬 채근을 한다. 그러나 패터슨은 자신의 시를 비밀 노트에 담아두는 것에 자족할 뿐 스스로 시인이라고 정체화하기조차 거부한다. 시는 그의 인생 곳곳에 스며들어 삶을 낭송하고 있기에 시인이라는 레이블링은 거추장스럽다.


패터슨은 악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선량한 소시민처럼 보이지만 실은 감정과 의사 표현에 서툰 소통 장애를 겪고 있다. 늘 불만에 차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동료에게 형식적인 공감의 표시조차 할 줄 모른다. 로라가 만든 희한하기 짝이 없는 요리를 별 도리 없이 꾸역꾸역 목구멍에 쑤셔 넣을 뿐이고, 그녀가 빠듯한 가정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자아 실현을 위해 몇 십만 원짜리 기타를 사겠다고 몰염치한 선언을 할 때도 조리 있게 반박하지 못한다. 반려견 마빈이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던 비밀 노트를 갈기갈기 한 줌의 종이잿더미로 찢어버렸을 때조차 별다른 동요 없이 분노를 안으로 삭혀버린다. 


그가 유일하게 내밀한 감정을 배설하는 창구는 비밀 노트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비밀 노트 앞에서조차 패터슨은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하다. 이를 테면 로라에 대한 애정을 질료 삼아 사랑의 시를 쓰지만 현실 속 이 두 사람의 부부 관계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서로를 더없이 사랑하는 젊은 부부처럼 보여지는 겉모습 그 이면에는 미세한 갈등과 균열이 있다. 마치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헤어진 연인을 겁박하기 위해 사용된 장난감 총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이상하게 공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터슨은 로라를 향한 자기 기만적 사랑시를 낭송한다. 그리고  가느다랗고 세세한 심리 묘사를 아담 드라이버는 눈빛 연기만으로 완벽하게 표현한다.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스마트 폰도 없이 아날로그 신념을 고수하는 패터슨은 마치 그가 살고 있는 시골 소도시 패터슨을 꼭 닮았다. 시간이 비켜나간 듯한 남루한 옷차림과 어딘가 궁상 맞은 생활 양식. 모든 게 간소화된 시간표대로 흘러간다. 시란 무릇 문학 장르 가운에서도 마음에 떠오르는 느낌과 감정을 가장 압축된 언어로 극도로 정제시킨 양식이므로, 그의 삶은 표면상으로 이미 시적이다. 그리고 패터슨은 시 씀이라는 예술적 실천을 통해 내용으로도 무결한 시적 삶의 완결성을 성취한다.


패터슨의 시는 이 무료하고 따분하며 언쿨(?)해 보이는 그의 삶에서 절묘한 풍류를 건져 올린다. 시를 쓰는 버스운전사라니! 패터슨이 자아내는 기묘한 멋은 아내 로라의 일상에도 깃들여져 있다. 쉼 없이 그림을 그리고 음식을 만들고 전형적인 백인 남성 음악 컨츄리 가수를 꿈꾸는 유색인종 여성. 이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뜻밖의 조합은 인물의 매력도를 높이고 단조로운 서사 안에 강렬한 정서적 호소력을 낳는다. 문학, 음악, 그림, 요리 등 일상을 예술로 채워 넣을 때 아마추어의 일상은 예술이 된다. 


<패터슨>에는 각종 유형의 사랑이 등장한다. "Without love what reason is there for anything?"라는 대사처럼 사랑은 인간을 작동시키고 인간은 인생이란 시를 쓴다. 사랑이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의 힘을 믿을 때 인생은 시가 되고 고유의 운율감을 형성한다. 패터슨에 패터슨이 살고 패터슨은 패터슨이라는 제목의 시를 쓴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시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비밀 노트를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상실감을 달래던 패터슨 곁에 어느 일본인 관광객이 우연히 다가온다. 인종과 국적은 달라도 그 역시 패터슨처럼 시로 숨을 쉬고 노트에 시를 쓰는 생활형 '시인'이다. 그는 패터슨 출신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숨결을 느끼고자 이곳 패터슨을 찾았다. 그리고 작별하기 전 빈 노트를 패터슨에게 선물한다. 더 이상 패터슨에게 시가 남아 있지 않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때 시는 이렇게 제발로 패터슨 곁에 찾아온다. 종이에 적힌 글자는 사라져도 그 정념은 소멸되지 않는다. 휘발된 언어는 다시 종이에 소환되어 시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크고 작은 풍파가 닥쳐도 마치 또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굴러가는 인생처럼 말이다. 



*** <패터슨>은 짐 자무쉬의 뛰어난 예술적 성취보다도 주연 배우 아담 드라이버의 재발견에 의의가 있다. 얼마간 헐리우드에서 소비되다 스르르 사라질, 유들유들 능청스러운 도시 남자 캐릭터에나 어울리는 개성파 배우쯤으로 치부했던 아담 드라이버가 이렇게 예술 감성 짙은 외골수 시골 노동자의 복잡한 내면을 완벽하게 소화해 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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