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movie buff 빙의

VIVA BVSC!

생산적 잉여니스트 2018. 1. 7. 17:18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초반에 이르기까지 국내 씨네필 사이에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인기는 가히 뜨거웠다.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는 고백은 뭐랄까... '거 쫌 영화 볼 줄 알고 음악 좀 들을 줄 아네' 하는 평균 이상의 문화소양을 나타내는 딜레탕트적 훈장 같았다. 당시만 해도 생소하게 느껴지던 이역만리 남미를 친숙하게 만들었고 정열이 넘치는 음악의 나라 쿠바에 대한 로망을 안겨주었다. 


BVSC의 극적인 탄생에서부터 노장 멤버들의 구비진 인생사, 그리고 그리고 만년에 찾아온 거짓말 같은 인기와 성공. 각 멤버의 인생 하나하나가 통한의 음악이자 환난도 꺾지 못한 정열의 노래였다. 1996년 영국 레코드 프로듀서 닉 골드와 미국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는 쿠바 음악과 서부 아프리카 음악을 재발견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1950년대 이른바 쿠바 음악의 황금기로 불리던 시절,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활동을 선보였지만 카스트로 정권 아래 정치적 탄압으로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은닉하던 원로 뮤지션들을 발굴, BVSC를 결성했다. 실버가 대세를 이루는 사상 초유의 프로젝트 밴드가 탄생한 것이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1940년대 실제 쿠바에서 현존했던 유명 사교장 이름에서 따 왔다. 


쿠바는 토착민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 그리고 정복자 백인이 한데 엉킨 혼종의 산실이다. 스페인 식민 지배를 시작으로 정복과 수탈로 얼룩졌던 역사의 그늘 아래 아프리카의 흥겨운 원시적인 리듬과 유럽의 섬세하고도 우아한 선율이 뒤엉킨 쿠바 고유의 음악이 발달했다. BVSC의 원류는 기본적으로 아프로-쿠반 음악에 정초하지만, 쿠바 특유의 독창적인 쏜, 볼레로, 과히라, 차차차 등 여러 장르가 한데 뒤섞인 폭넓은 스펙트럼의 수준 높은 음악을 유감없이 선보인다. 특히 아프리칸 쿠바 음악의 듣는 이의 심장을 쿠바의 리듬으로 고동치게 만들었다


BVSC는 사회주의 정권 아래 고사했던 쿠바 전통 음악을 부활시키는 모멘텀을 마련했다. 사회주의 국가로 체제 정비를 한 이래 이념적인 갈등에서 비롯된 정치적인 고립과 궁핍한 경제에 가려졌던 쿠바의 흥취를 재점화했다. 데뷔 앨범은 출시되자마자 어깨춤을 절로 들썩이게 만드는,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슬픈 정념의 멜로디로 전 세계를 단숨에 매료시켰고 카리브의 열정과 낭만이 숨 쉬는 흥의 공간, 쿠바의 기상을 세상 가득 메웠다.


유럽과 북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1961년 쿠바 혁명 이후 단교 상태에 있던 미국에서의 성공이 괄목할 만하다. 카네기 홀에서도 폭발적인 호응도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얼어붙었던 외교 관계에 찰나의 훈기를 불어넣었다. 그 밖에도 대대적인 순회 공연을 이어갔으며 독보적인 인지도를 쌓았다. 그리고 1999년 거장 빔 벤더스가 이들의 궤적을 다룬 동명의 다큐 영화를 제작했고 그 뒤는 (만인이 주지하다시피) 전설이 되었다. 


20년이 훌쩍 흘러 BVSC의 '그 이후'를 재조명하는 다큐가 <Buena Vista Social Club Adios>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완성도를 떠나 BVSC를 사랑하고 응원하던 팬들에게 더없이 반갑지 아니할 수 없는 속편이자 후일담인 셈이다. 90년대 후반 당시 이미 그룹 멤버들의 대다수가 이미 칠순과 팔순 언저리의 노년이었다. 황혼에 거둔 명성과 성공이 더욱 더 값지고 가슴 한 켠 애절했던 이유도 이들 모두가 함께 활동할 날이 오래 남지 않았음을 당사자를 비롯한 모두가 예견했기 때문이다. 


2003년 이래 고령의 멤버 하나둘씩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총 8명이 타계했다. 쿠바 보컬계의 전설로 여겨지는 콤파이 세군도와 아브라임 페레르도 노환으로 별세했다. BVSC의 간판 스타 중 한 명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뮤지션이라서 페레르의 죽음은 유독 가슴이 저민다. 페레르의 인생에는 쿠바의 파란만장했던 현대사의 굴곡이 핍진하게 새겨져 있다. 





페레르는 흑인 노예 후손의 가난한 하층 빈민 출신으로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젊어서는 나름 실력을 인정 받아 유명 뮤지션으로 활동했지만 쿠바 혁명 이후 아메리칸 재즈와 볼레로 등 리듬과 멜로디가 강조되는 민속 음악이 부르주아 음악으로 낙인 찍히면서 하루 아침에 생계를 잃어버린다. 페레르는 BVSC의 보컬로 발탁되기 전까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거리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목숨을 연명했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압박과 통제의 희생자로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삶의 의미를 박탈당한 채 울분의 시간을 견뎌냈던 그였기에 일흔이 다 되어서야 원 없이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된 인생 역전사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이 드라마틱하다. 그래서인지 '쿠바의 냇 킹콜'이라고 불릴 만큼 편안하고 감미로운 음색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세상의 이치를 다 통달한 듯한 들끓는 정한이 사무치게 전해진다. 





페레르는 사회주의 독재 정권의 처절한 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연히 시대와 공간을 잘못 타고나 희망조차 사치로 여겨지던 질곡의 시간을 살아냈지만 우연하게도 천금의 기회가 스르르 찾아와 칠십 평생 누려보지 못한 부와 명성을 누렸다. 길고 긴 오욕의 터널을 지나 말년에 이르러서야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스케일로 만개했고 세기의 사랑을 받으며 외롭지 않게 이승을 떠났다. 생전 세상에 희망 따윈 믿지 않았을 비운의 뮤지션이 아이로니컬하게도 희망의 증거로 남은 것이다.



The iconic cover photo for the 1997 album Buena Vista Social Club.

World Circuit/Nonesuch

페레르의 아우라는 BVSC의 데뷰 앨범 및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포스터에도 박제되어 있다. 음반 녹음 당일 스튜디오로 향하는 페레르의 모습이 우연찮게 카메라에 담겼고 진한 쿠바 내음과 BVSC의 감수성이 그대로 담긴 근사한 앨범 커버가 즉석에서 탄생했다. 그 어떤 예술적 구상으로도 흉내 낼 수 없을,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 우연하게 포착한 순간이었지만 구두닦이로 거리를 전전하던 암흑의 세월에도 바래지 않고 보존되었던 피사체의 예술적 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물이었다. 





BVSC는 멤버의 빈자리를 새로운 뮤지션으로 수혈하고 재정비를 거듭해가며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15년 오바마 재임 시절 백악관 초청으로 특별 공연을 펼쳤는데 이로써 지난 50년 동안 백악관에서 무대에 오른 최초의 쿠바 뮤지션으로 기록되었다특히 홍일점 오마라 포르투온도의 건재함이 눈에 띄는데,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아름답고 도저한 음색의 깊이로 노익장을 과시한다. 눈 감는 그날까지 노래를 부르겠다는 그녀의 순수한 열정과 집념은 BVSC가 '이 빠진 호랑이'마냥 예전만큼의 음악적 기량을 드러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신화적 명맥을 이어가게 하는 결정적인 동원이다.  


쿠바의 국민 시인 호세 마르티는 '음악은 국민의 영혼이다'라고 했다. 카리브 해의 뜨거운 열정과 기운이 스며들어 '음악이 강처럼 흐르는' 쿠바라는 공간에 실로 합당한 명제다. 사실 국민이라는 개념도 지나치게 광대하다. 실은 개개인 모두가 음악을 감상하고 즐기는 혼을 내장하고 있다. 오마라 포르트온도는 영화 말미에 음악은 인간에 내재된 본성 내지 본능 같은 거라고 이야기한다. 명치를 울리는 음악 한 곡으로도 인생의 풍경이 아름다워지고 삶의 풍미가 달라지는 걸 보면 한 치 오류도 없이 지당한 말씀이다. BVSC는 쿠바 전통 음악을 대표하는 전설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쿠바라는 공간적 특수성을 탈색시키고 나면 결국 인간이란 반드시 음악에 의지해서 살 수 밖에 없는 흥의 동물임을 절절하게 방증하는 보편타당한 사례이다. 




'movie buff 빙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투는 나의 힘>  (0) 2019.02.21
패터슨의 패터슨의 패터슨  (0) 2018.02.15
이퀼리브리엄  (0) 2017.10.04
Through The Lens_로베르 두아노  (0) 2017.10.03
Aging Well  (0) 2017.08.27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